[한국사 인물 5편] 발해와 후삼국 통일: 대조영·왕건

2025. 12. 13. 11:00역사 Detox_한국사 위인들

프롤로그: 분열과 통합의 시대

676,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옛 땅, 만주 벌판은 신라 손에 들어오지 않았고, 당나라와 말갈족이 차지했으며, 고구려 유민들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698, 한 영웅이 일어났습니다.

대조영(大祚榮)이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만주에 나라를 세웠으니, 이것이 발해(渤海)입니다.

"고구려를 계승한다", "해동성국(海東盛國)"을 외치며, 200년간 만주를 호령했습니다.

한편 신라는 9세기에 들어서며 흔들렸습니다. 진골 귀족들이 권력 다툼을 벌였고, 왕위 쟁탈전이 이어졌으며,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고, 지방 호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892, 견훤(甄萱)이 후백제를 세웠고, 901, 궁예(弓裔)가 후고구려를 세웠으며, 신라까지 합쳐, 후삼국시대가 열렸습니다. 다시 분열의 시대였고, 전쟁의 시대였으며, 혼란의 시대였습니다.

이때 왕건(王建)이 나타났습니다.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웠으며(918), 후백제를 무너뜨리고(936), 신라를 흡수하여(935), 후삼국을 통일했습니다.

오늘은 새로운 나라를 세운 두 영웅, 대조영과 왕건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 대조영 (大祚榮, ?~719) - 발해 건국의 아버지

고구려 멸망 후

668, 고구려가 멸망했습니다.

평양성이 함락되고, 보장왕이 항복했으며, 705년 역사가 끝났지만, 고구려인의 정신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당나라가 고구려 땅을 지배하려 했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했으며(평양), 고구려 유민을 강제 이주시켰고, 압박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인들이 저항했고,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독립을 꿈꿨습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대조영(大祚榮)입니다.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 수 없고(650~670년대 추정), 고구려 장군 출신 또는 말갈족 추장 가문으로, 기록마다 차이가 있지만,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 지배 아래 있었고, 부친 걸걸중상(乞乞仲象, 또는 걸사비우)와 함께 고구려 부흥을 꿈꿨습니다.

대조영 초상화 와 동상
대조영 초상화 와 동상 / 출처 : HMAP

696: 탈출의 시작

696, 기회가 왔습니다. 중국에서 거란(契丹)이 반란을 일으켰고(이진충의 난), 당나라가 혼란에 빠졌으며, 당나라가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들을 동원해, 거란 토벌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유민들이 배신했습니다. "이 기회에 도망치자!", 대조영의 부친 걸걸중상과, 말갈족 추장 걸사비우 등이, 수만 명의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이끌고, 집단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당나라가 추격했고, 이귀상(李楷固)이 이끄는 당군이, 도망치는 유민들을 쫓았으며, 험난한 여정이었습니다. 만주 벌판을 달렸고,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으며, 당군과 계속 전투를 벌였습니다.

 

천문령(天門嶺) 전투: 지금의 지린성 둔화(敦化) 일대로 추정되며, 대조영이 당나라 추격군을 크게 격파했고, 이귀상 군대를 물리쳤으며, 추격을 따돌렸습니다. 이 전투가 발해 건국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698: 발해 건국

탈출에 성공한 대조영이, 동모산(東牟山, 지금의 지린성 둔화 일대)에 정착했습니다.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통합하고, 세력을 키웠으며, 주변 부족을 복속시켰고, 당나라가 간섭하지 못하는 독립 세력이 되었습니다.

698, 대조영이 왕을 칭했습니다.

나라 이름을 () 또는 진국(震國)이라 하고, 스스로 진국왕(震國王) 또는 대진국왕이라 칭했으며, 새로운 나라가 탄생했습니다.

나중에 나라 이름을 발해(渤海)로 바꿨습니다(713년 당나라로부터 발해군왕 책봉 받으며).

"발해"는 큰 바다를 뜻하고, 동해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며, 해동(海東)의 강국을 꿈꾸는 이름이었습니다.

 

발해 건국 지도
발해 건국 지도 / 출처 : 수각류일기

고구려 계승

대조영이 고구려 계승을 천명했습니다.

"우리는 고구려의 후예다", "고구려의 영광을 되찾는다", 국가 정체성을 고구려에서 찾았고:

  • 지배층: 대부분 고구려 유민
  • 영토: 고구려 옛 땅 (만주 일대)
  • 문화: 고구려 전통 계승
  • 대외 정책: 당나라와 대등

발해 스스로 "고려(高麗)"라 칭했고(고구려의 다른 이름), 중국 사서에는 "발해"로 기록되지만,

발해인들은 자신을 고려/고구려 사람으로 인식했으며,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 "고려국왕"이라 서명했습니다.

 

당나라와의 관계

초기에는 당나라와 긴장 관계였습니다.

당나라가 발해를 견제했고, 군사적 압박을 가했으며, 대조영이 맞섰습니다.

하지만 현실적 외교도 펼쳤습니다.

713, 당나라 현종에게 사신을 보냈고, 책봉을 받아들여, "발해군왕(渤海郡王)" 칭호를 받았으며, 형식상 당나라 신하가 되었지만(책봉 체제), 실제로는 독립국으로 행동했고, 당나라도 함부로 간섭하지 못했습니다.

 

719: 승하

719, 대조영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미상(60~70세 추정), 재위 21년 동안, 발해의 기틀을 다졌고, 고구려 유민을 통합했으며, 당나라와 대등한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아들 대무예(大武藝)가 뒤를 이어, 무왕(武王)이 되었고, 발해를 더욱 강성하게 만들었으며, 손자 대흠무(大欽茂) 문왕(文王)이 되어, 발해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발해의 발전

대조영 이후 발해는 200년간 번영했습니다:

 

영토 확장:

  • 남쪽: 대동강~원산만까지
  • 북쪽: 송화강 유역
  • 서쪽: 요하 유역
  • 동쪽: 연해주 일부
  • 최대 영토: 한반도 + 만주 대부분

해동성국(海東盛國):

  • "바다 동쪽의 번성한 나라"
  • 중국도 인정하는 강국
  • 문화·경제 발전
  • 일본과 외교·무역

5 15 62:

  •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지금의 헤이룽장성 닝안)
  • 5개 경(수도급 도시)
  • 15개 부(지방 행정구역)
  • 62개 주
  • 체계적 행정 조직

문화:

  • 온돌 문화
  • 고구려 양식 건축
  • 불교 융성
  • 독자적 문자 시도(가림토?)

926: 발해 멸망

하지만 발해도 끝내 무너졌습니다.

926, 거란(契丹, 요나라)이 침공했고, 불과 한 달 만에, 발해가 멸망했습니다.

너무 빨랐습니다.

 

200년 강국이, 한 달 만에 무너진 이유는:

  • 내부 갈등 (지배층 분열)
  • 급작스러운 침공
  • 거란의 압도적 군사력
  • 준비 부족

발해 왕족과 귀족 일부가, 고려로 망명했고(수만 명), 고려 태조 왕건이 받아들여, "같은 고구려 후예"라며 우대했으며, 발해 유민이 고려에 흡수되었습니다.

 

평가

대조영은 고구려 부흥의 영웅입니다:

  • 고구려 유민 결집
  • 독립국 건설
  • 해동성국 기반 마련
  • 고구려 정신 계승

발해는 한국사의 일부인가?

 

논란이 있지만:

  • 포함 입장: 고구려 계승, 민족 동일, 고려가 계승 의식
  • 유보 입장: 만주 국가, 말갈족 포함, 중국과 공유

대부분의 한국 학자는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로 보며, 남쪽은 통일신라, 북쪽은 발해로, 둘 다 한국사에 포함시킵니다.


👑 왕건 (王建, 877~943) - 고려 건국, 후삼국 통일

혼란의 시대

9세기 후반, 통일신라가 흔들렸습니다.

 

문무왕 이후 200년간 번영했지만, 9세기 들어 쇠퇴했고:

  • 진골 귀족 권력 다툼: 왕위 쟁탈전 치열
  • 왕권 약화: 150년간(780~930) 20명 왕 교체
  • 지방 호족 대두: 중앙 통제력 상실
  • 백성 도탄: 세금 과중, 반란 빈발
  • 해적 창궐: 장보고 사후 무역로 혼란

지방 호족들이 사실상 독립했고, 군사력을 키웠으며, "호족(豪族)" 또는 "성주(城主)", "장군(將軍)"을 자칭했습니다.

 

후백제와 후고구려

892, 견훤(甄萱)이 전라도 무진주(지금의 광주)에서, 후백제(後百濟)를 세웠습니다.

본래 신라 장군 출신이었으나, 반란을 일으켜, "백제를 부흥한다", 독립 왕국을 선포했고, 백제 옛 땅(전라도·충청도)을 장악했습니다.

901, 궁예(弓裔)가 철원(지금의 강원도 철원)에서, 후고구려(後高句麗)를 세웠습니다(국호는 "고려"로도 씀).

신라 왕족 출신이라 자칭했고(진위 불명), "고구려를 계승한다", 왕을 칭했으며, 경기도·강원도·황해도를 장악했습니다.

신라는 경주 일대만 겨우 지켰고, 왕권은 유명무실했으며,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 892~936)가 열렸습니다.

후삼국 지도
후삼국 지도 / 출처 : 나무위키

왕건의 출신

왕건(王建) 877(또는 878) 송악(지금의 개성)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유한 호족 가문 출신으로:

  • 증조부 작제건(作帝建): 송악 호족
  • 조부 왕융(王隆): 송악 세력 확대
  • 부친 왕륭(王隆): 송악 일대 장악, 해상 무역으로 부 축적

왕건 집안은 대대로 해상 세력이었고, 무역으로 부를 쌓았으며, 군사력도 보유했고, 송악 지역의 실력자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무예를 익혔으며, 리더십이 뛰어났고, 일찍이 큰 인물이 될 것으로 예견되었습니다.

왕건 표준영정
왕건 표준영정 / 출처 : SPN

궁예 휘하로

900년대 초반, 왕건의 아버지 왕륭이, 아들 왕건을 궁예에게 보냈습니다.

송악 세력을 궁예 세력에 합류시킨 것으로, 정치적 선택이었고, 왕건이 궁예의 장군이 되었으며,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뛰어난 전공:

  • 수군을 이끌고 서해안 일대 장악
  •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승리
  • 나주(전라도) 일대 확보
  • 금성(나주) 전투 승리 (903)

왕건의 명성이 높아졌고, 궁예 정권의 핵심이 되었으며, 백성들이 왕건을 따랐고, 부하들이 존경했습니다.

 

궁예의 폭정

하지만 궁예가 변했습니다. 초기에는 나름 괜찮았지만, 점차 폭군이 되었고:

  • 관심법(觀心法): "내가 사람 마음을 읽는다", 맘대로 죽임
  • 아내·자식 살해: 왕후와 두 아들을 죽임 (의심)
  • 미륵 자칭: "나는 미륵불이다" 신격화
  • 국호 변경: 후고구려 마진(摩震, 911) → 태봉(泰封, 914)
  • 철원 천도: 수도를 철원으로
  • 중세금 징수: 백성 수탈

신하들과 백성들이 고통받았고, 궁예에 대한 불만이 쌓였으며, "언제까지 이 미친 왕을 섬기나", 반란이 무르익었습니다.

 

918: 고려 건국

918 6, 왕건의 부하들과 신하들이,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이, 왕건을 추대했고, "궁예를 몰아내고 왕이 되십시오"

왕건이 처음에는 거절했지만(기록상), 신하들이 강권했고, 결국 받아들였으며, 궁예를 축출했습니다. 궁예는 도망쳤다가,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고(또는 굶어 죽음), 비참한 최후였습니다.

918 6, 왕건이 즉위했습니다.

42세의 나이로, 왕이 된 것이었고, 국호를 고려(高麗)라 했습니다.

태봉을 계승하되, 이름을 바꾼 것으로,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였고, 수도는 송악(개성)으로 정했으며(고향), **고려 태조(高麗 太祖)**가 탄생했습니다.

 

북진 정책과 발해 유민

왕건이 북진 정책을 천명했습니다.

"고구려를 계승한다", "북쪽 영토를 되찾는다",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삼아, 중시했고, 북진 기지로 삼았으며, 국가 정체성을 고구려에서 찾았습니다.

926 발해가 거란에 멸망하자,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망명해 왔고, 왕건이 환영했습니다.

"우리는 같은 고구려 후예", 발해 왕족을 귀족으로 대우했고, 수만 명 유민을 받아들였으며, "고려가 발해를 계승한다" 의식을 보여줬습니다.

 

호족 통합 정책

왕건의 가장 중요한 정책은 호족 통합이었습니다.

전국에 수십 개 호족 세력이 있었고, 각자 독립적이었으며, 이들을 어떻게 통합하느냐가 관건이었습니다.

 

회유 정책:

  • 혼인 동맹: 호족의 딸들과 결혼 (무려 29명의 부인!)
  • 지방 자치 인정: 호족의 기득권 보장
  • 관직 수여: 고려 조정에 참여시킴
  • 경제적 지원: 토지 하사
  • 사성(賜姓) 정책: 왕씨 성 하사 (왕씨가 아니어도 왕씨로)

무력보다는 포용으로, 적보다는 동지로, 왕건의 정치력이 빛났고, 많은 호족이 자발적으로 귀순했으며, 고려의 기반이 탄탄해졌습니다.

 

견훤과의 대결

하지만 후백제 견훤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견훤도 야심가였고, 백제 부흥을 꿈꿨으며, 전라도·충청도를 장악했고, 군사력이 강했습니다.

 

930: 고창(안동) 전투

  • 견훤이 신라 경주 공격 준비
  • 왕건이 신라 구원
  • 고창(지금의 안동)에서 격돌
  • 왕건군 패배
  • 신숭겸, 김락 전사 (왕건을 대신해 죽음)
  • 왕건 간신히 탈출

왕건 생애 최대 패배였고, 충신들이 희생했으며, 왕건이 충격받았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934: 운주(홍성) 전투

  • 왕건이 재도전
  • 후백제군 격파
  • 견훤 세력 약화

935: 신라의 항복

935,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신라가 스스로 항복한 것입니다.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敬順王),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했고, 경주 일대만 겨우 지키는 신세였으며, 견훤과 왕건 사이에 끼어, 고립되어 있었고, 왕건에게 항복을 결정했습니다.

935 11, 경순왕이 개성으로 왕건을 찾아갔고, "신라를 고려에 바칩니다", 스스로 왕관을 벗었으며, 신라가 멸망했습니다(BC 57~AD 935, 992년간 존속).

왕건이 극진히 대우했습니다. 경순왕을 정승공(正承公)으로 봉하고, (낙랑공주)을 경순왕에게 시집보내고, 사위로 삼았으며, 경주를 동경(東京)으로 삼아, 경주를 보존했고, 신라 왕족·귀족을 우대했습니다.

평화적 통일이었고, 유혈 없이 천년 왕국을 흡수한 것으로, 왕건의 포용력을 보여줬습니다.

 

936: 후백제 멸망

이제 남은 것은 후백제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견훤에게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935, 견훤이 넷째 아들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지만, 장남 신검(神劍)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동생들(양검, 용검)과 함께,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켰으며,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견훤이 탈출했습니다(936 3). 금산사를 빠져나가, 고려로 망명했고, "왕건에게 도움을 청한다", 아들에게 배신당한 비극이었습니다.

왕건이 견훤을 받아들였고, 오히려 극진히 대우했으며, "함께 후백제를 치자" 동맹을 맺었고, 견훤이 고려군을 안내했습니다.

936 9, 왕건이 대군을 이끌고, 후백제 수도 전주를 공격했고, 일리천(一利川, 지금의 전북 완주)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격파했으며, 신검이 항복했고, 후백제가 멸망했습니다(892~936, 44년간 존속).

 

후삼국 통일 완성! 936년 왕건이, 한반도를 재통일했고, 고려가 후삼국을 흡수했으며, 통일 왕조가 탄생했습니다.

 

견훤의 말년

견훤은 후백제 멸망을 보고, 얼마 못 가 죽었습니다(936년 또는 937). 왕건이 극진히 장례를 치러줬고, 비극적 영웅의 최후였습니다.

견훤은 역사에서 비운의 인물로 평가됩니다.

능력은 뛰어났지만, 아들에게 배신당했고, 후백제를 세웠지만, 스스로 멸망시키는 빌미를 제공했으며, 왕건에게 패배했지만, 그 과정이 비극적이었습니다.

 

태조의 치세

왕건이 통일 후, 안정적으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민생 안정:

  •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 구휼
  • 세금 감면
  • 노비 해방 (일부)
  • 불교 장려

호족 통합 지속:

  • 계속 혼인 동맹
  • 지방 자치 인정
  • 중앙-지방 균형

북진 정책:

  • 거란과 대립
  • 고구려 계승 의식
  • 평양(서경) 중시

대외 관계:

  • 거란과 적대 (942년 거란 사신 추방)
  • 후당(後唐, 중국)과 친선
  • 일본과 교류

훈요십조 (訓要十條)

943 5, 왕건이 병이 깊어지자, 후계자들에게 유훈을 남겼으니, 이것이 훈요십조(訓要十條)입니다.

 

열 가지 가르침으로:

  1. 불교 숭상: 불교를 공경하라
  2. 사원 남설 금지: 함부로 절 짓지 마라
  3. 왕위 계승: 적장자 계승, 공신 자문
  4. 당나라 제도: 중국 제도를 본받되, 거란(契丹)은 금수같으니 사귀지 마라
  5. 서경 중시: 평양(서경)을 자주 순행하라
  6. 연등·팔관회: 불교·토착 행사 장려
  7. 왕의 수신: 백성의 소리를 들어라
  8. 차령 이남 제한: 차령(충청도) 이남 사람은 중용하지 마라 (논란)
  9. 관리 임명: 공신과 상의하라
  10. 독서: 경전을 읽어라

특히 4 (거란 경계) 8 (지역 차별?)가 논란인데, 8조는 견훤 세력(전라도) 경계로 해석되지만, 지역 차별로 비판받기도 합니다.

 

943: 승하

943 5 29, 왕건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67 (또는 66), 재위 26(918~943) 동안,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했으며, 나라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아들 혜종(惠宗)이 뒤를 이었고(장남 무, 재위 943~945), 이후 정종, 광종 등이 이어지며, 고려 왕조가 이어졌고, 왕건의 유지가 계승되었습니다.

왕건의 묘는 개성 현릉(顯陵)인데, 북한 지역이라 방문이 어렵고, 2013년 북한이 정비했다고 발표했으며, 언젠가 방문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평가

왕건(고려 태조)통합의 리더였습니다:

  • 후삼국 통일 (936)
  • 평화적 방법 중시 (신라 항복, 호족 회유)
  • 고구려 계승 의식
  • 발해 유민 포용
  • 29명 부인 (정치적 혼인)
  • 민생 안정
  • 불교 장려

긍정적 평가:

  • 분열 시대 종식
  • 포용 정치
  • 백성 사랑
  • 고려 500년 기틀

비판:

  • 지나친 혼인 동맹 (29명 부인)
  • 호족 세력 온존 (훗날 문제)
  • 지역 차별? (훈요십조 8)

하지만 전반적으로 위대한 군주로 평가받고, 한국사 최고의 통일 군주 중 한 명이며, 고려를 세운 국조(國祖)입니다.

 


💭 에필로그: 새 왕조, 새 시대

대조영과 왕건의 공통점

대조영왕건, 두 사람은 200년 시차가 있지만, 공통점이 많습니다:

1. 새 왕조 건설

  • 대조영: 발해 건국 (698)
  • 왕건: 고려 건국 (918)

2. 고구려 계승 의식

  • 대조영: "우리는 고구려 후예"
  • 왕건: "고려는 고구려 계승"

3. 통합 능력

  • 대조영: 고구려 유민 + 말갈족
  • 왕건: 후삼국 + 호족

4. 외교 능력

  • 대조영: 당나라와 긴장-화해
  • 왕건: 거란 배척, 후당 친선

5. 민생 중시

  • 대조영: 안정적 통치
  • 왕건: 세금 감면, 구휼

발해와 고려

발해(698~926, 228):

  • 만주 + 한반도 북부
  • 고구려 계승
  • 해동성국
  • 거란에 멸망
  • 유민이 고려로

고려(918~1392, 474):

  • 한반도 전역 (대동강 이남)
  • 고구려 + 신라 계승
  • 발해 유민 포용
  • 북진 정책
  • 조선에 교체됨

고려가 발해를 직접 계승하지는 못했지만(영토상), 정신적으로 계승했고, 발해 유민을 받아들여,

고구려-발해-고려 맥락을 이었으며, "고려"라는 이름 자체가 고구려를 뜻했습니다.

 

후삼국 통일의 의미

왕건의 통일(936)신라의 통일(676)과 다릅니다:

신라 통일:

  • 외세(당나라) 이용
  • 동족(백제·고구려) 멸망
  • 영토 축소 (만주 상실)
  • 무력 중심

고려 통일:

  • 자력 통일 (외세 개입 없음)
  • 평화적 흡수 (신라 항복)
  • 포용 정책 (호족 통합)
  • 정치적 해결

왕건의 통일이 더 포용적이었고, 덜 유혈적이었으며, 민족 통합에 기여했다는 평가입니다.

 

고려 시대의 시작

고려는 474년간(918~1392) 지속되었습니다:

전기 (918~1170):

  • 태조~의종
  • 왕권 안정
  • 문화 융성
  • 과거제 실시
  • 거란·여진 격퇴

중기 (1170~1270):

  • 무신정권 (100)
  • 몽골 침략
  • 강화도 천도
  • 삼별초 항쟁

후기 (1270~1392):

  • 원 간섭기
  • 공민왕 개혁
  • 왜구 격퇴
  • 이성계 등장
  • 조선 건국

고려의 유산:

  • 팔만대장경: 세계 최고 대장경
  • 금속활자: 세계 최초 (직지심체요절)
  • 청자: 고려청자, 비색의 미
  • Korea: 나라 이름의 어원
  • 불교 문화: 사찰, 불상,

현재에 주는 의미

대조영과 왕건이 주는 교훈:

대조영 -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 멸망 후에도 재건
  • 독립 정신
  • 계승 의식

왕건 - 포용과 통합의 리더십

  • 적을 동지로
  • 무력보다 설득
  • 평화적 통일
  • 다양성 존중

특히 왕건의 포용 정책은, 현대 한국 사회에도 시사점을 줍니다. 분열된 사회를 통합하고, 다양한 집단을 하나로 모으며, 평화적 방법을 찾는, 리더십의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


🎯 핵심 정리

두 인물 비교

이름 시기 주요 업적 특징
대조영 698~719 발해 건국 고구려 계승
왕건 918~943 고려 건국, 후삼국 통일 포용 통합

 

대조영 - 발해 건국

생애: ?~719주요 사건:

  • 696: 고구려 유민 탈출
  • 천문령 전투: 당나라군 격파
  • 698: 발해(진국) 건국
  • 713: 당나라로부터 책봉
  • 719: 승하

발해의 발전:

  • 영토: 만주 + 한반도 북부
  • 5 15 62주 체제
  • 해동성국
  • 926: 거란에 멸망

의의:

  • 고구려 부흥
  • 남북국시대 (신라 + 발해)
  • 독립 정신

왕건 - 고려 건국

생애: 877 ~ 943 (26)

 

주요 사건:

  • 900년대: 궁예 휘하 장군
  • 918: 궁예 축출, 고려 건국
  • 926: 발해 유민 수용
  • 930: 고창 전투 (패배, 신숭겸 전사)
  • 935: 신라 항복 (경순왕)
  • 936: 후백제 멸망 (일리천 전투)
  • 후삼국 통일 완성
  • 943: 승하

정책:

  • 호족 통합 (혼인 동맹 29)
  • 북진 정책 (고구려 계승)
  • 불교 장려
  • 훈요십조 (유훈 10)

후삼국시대

신라 말기 (9세기):

  • 진골 귀족 권력 다툼
  • 지방 호족 대두
  • 왕권 약화

후삼국 형성:

  • 후백제 (892~936): 견훤, 전라·충청
  • 후고구려/태봉 (901~918): 궁예, 경기·강원
  • 신라 (~935): 경주 일대만

고려 통일 (936):

  • 918: 고려 건국 (왕건)
  • 935: 신라 항복
  • 936: 후백제 멸망

왕건의 통일 전략

호족 회유:

  • 29명 부인 (혼인 동맹)
  • 관직 수여
  • 경제적 지원
  • 지방 자치 인정

평화적 흡수:

  • 신라: 스스로 항복 (경순왕 우대)
  • 후백제: 내분 이용 (견훤 망명)

포용 정책:

  • 발해 유민 수용
  • 신라 유민 대우
  • 후백제 잔당 회유

고려의 특징

국호: 고려 (고구려 계승) 수도: 개성 (송악) 3: 개경, 서경(평양), 동경(경주)

정체성:

  • 고구려 계승 의식
  • 북진 정책
  • 거란 배척
  • 불교 국가

지속: 918~1392 (474)


📚 참고 & 방문 정보

유적지

발해:

  • 상경용천부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 - 발해 수도
  • 정혜공주 묘 (중국)
  • 북한 지역 일부 유적

대부분 중국·북한에 있어 방문 어려움

고려 태조:

  • 현릉 (북한 개성) - 왕건 묘
  • 만월대 (북한 개성) - 고려 궁궐터
  • 숭의전 (개성) - 태조 제향

북한 지역이라 방문 제한

국내 관람 가능:

  •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 발해·고려 전시
  • 경주 박물관 - 신라 말기
  • 전주 - 후백제 도읍지
  • 철원 - 궁예 도읍지 (태봉)

추천 도서

『발해의 역사』 『고려 태조 왕건』(각종 평전) 『후삼국시대 연구』 『훈요십조 해설』

드라마

드라마 『태조 왕건』(2000 ~ 2003, SBS) - 발해 대조영 드라마 『천추태후』(2009) - 고려 초기


다음 포스팅 예고: 6 - 몽골에 맞선 고려인들: 최충헌·김윤후·삼별초 ⚔️

무신정권과 몽골 항쟁의 시대!


[Figures in Korean History Part 5] Balhae and the Unification of the Later Three Kingdoms: Dae Jo-yeong & Wang Geon

Prologue: An Era of Division and Unity

While Silla unified the Three Kingdoms in 676, they did not control the northern Manchurian lands, which were taken by the Tang Dynasty. In 698, Dae Jo-yeong rose to reclaim this land. Meanwhile, in the 9th century, Silla crumbled, leading to the Later Three Kingdoms period. Wang Geon emerged to unify the peninsula once again.


1. Dae Jo-yeong (?-719): The Father of Balhae

Resurrection of Goguryeo

  • After Goguryeo fell in 668, its people were oppressed by the Tang Dynasty but never lost their spirit.
  • The Escape (696): Capitalizing on a Khitan rebellion in China, Dae Jo-yeong and his father led Goguryeo refugees and Malgal people on a mass exodus.
  • Battle of Tianmenling: Dae Jo-yeong decisively defeated the pursuing Tang army, securing the foundation for a new state.

Founding and Legacy

  • 698: Founded the state of Jin (later renamed Balhae) at Dongmo Mountain.
  • Identity: Declared itself the successor of Goguryeo, eventually ruling vast territories in Manchuria and North Korea.
  • Haedong Seongguk: Known as the "Flourishing Country in the East," it lasted for over 200 years with a sophisticated administrative system.
  • Fall (926): Collapsed after a sudden invasion by the Khitan (Liao Dynasty). Its refugees, including the ruling class, fled to Goryeo.

2. Wang Geon (877-943): The Unifier of the Later Three Kingdoms

Rise to Power

  • Born into a powerful maritime family in Songak (Kaesong), Wang Geon served under the tyrant Gung Ye (founder of Later Goguryeo).
  • 1918 (Founding of Goryeo): Due to Gung Ye’s tyranny, generals staged a coup and crowned Wang Geon as King. He named the country Goryeo to signify the succession of Goguryeo.

Policy of Integration

  • Inclusion: Unlike previous conquerors, Wang Geon embraced the local lords (Hojok) through marriage alliances (29 wives) and granted them autonomy.
  • Refugees: He warmly welcomed the refugees from the fallen Balhae kingdom, strengthening the legitimacy of Goryeo.

Unification (936)

  • Silla's Surrender (935): The last king of Silla voluntarily surrendered to Wang Geon, ensuring a peaceful transition.
  • Defeating Later Baekje: Wang Geon defeated the forces of Later Baekje (led by Gyeon Hwon’s son) in 936, finally completing the unification of the Later Three Kingdoms.

Epilogue: A New Era

Comparison of the Two Heroes

  • Dae Jo-yeong: Reclaimed the spirit of Goguryeo in the north against foreign powers.
  • Wang Geon: Achieved a "true unification" of the peninsula through tolerance, diplomacy, and the integration of diverse factions (Silla, Later Baekje, and Balhae).

Historical Significance Goryeo ruled for 474 years, giving rise to the name "Korea" and cultural heritages like the Tripitaka Koreana and Goryeo Celadon. Wang Geon’s leadership remains a model for integration and peace.


Would you like me to draft an outline for the next topic mentioned, "The Mongol Invasions and the Sambyeolcho Rebell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