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조선의 마지막 몸부림, 그리고 대한제국

2025. 11. 24. 11:00역사 Detox_한국사를 알아보자/🏯 근세: 조선 시대

프롤로그: 1894년 봄, 고부에서 시작된 함성

1894(고종 31) 1, 전라도 고부(古阜, 지금의 전북 정읍)에서 농민들이 봉기했습니다.

수천 명의 농민이 죽창과 농기구를 들고 관아로 몰려갔고, "탐관오리를 처벌하라!", "부당한 세금을 돌려달라!" 외쳤으며,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수탈에 분노한 것이었습니다.

농민들의 지도자는 전봉준(全琫準)이었습니다.

키가 작아 "녹두장군"으로 불린 인물로, 동학(東學) 지도자였고, 몰락 양반 출신이었으며, 농민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만석보(萬石洑)를 부수고(조병갑이 불법으로 쌓아 세금을 받던 보), 곡식을 백성에게 나눠줬으며, 이것이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의 시작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정은 진압군을 보냈고, 농민군은 더 크게 봉기했으며, 전라도를 넘어 충청도까지 퍼졌고, 전주성을 점령했습니다(5). 조선 조정이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했고, 청나라군이 들어왔으며, 일본도 "청나라가 왔으니 우리도 간다" 군대를 보냈고, 조선 땅에서 청일전쟁이 벌어졌으며, 농민군은 일본군과 싸우다 패배했고, 전봉준이 체포되어 처형되었습니다(1895).

 

"동학은 무엇인가?",

"왜 농민들이 봉기했나?",

"청일전쟁은 왜 일어났나?",

"갑오개혁은 무엇인가?",

"명성황후는 왜 죽었나?",

"대한제국은 어떻게 수립되었나?"

 

오늘은 조선이 망하고 대한제국이 수립되는 격동의 10(1894~1904)을 들려드리겠습니다.

동학교주 전봉준
전봉준 초상과 동학농민군 / 출처 : 한국 기록유산

 

📿 동학: 새로운 종교의 탄생

최제우와 동학 창시

1860(철종 11), 경주의 몰락 양반 최제우(崔濟愚, 1824~1864)가 새로운 종교를 창시했습니다.

동학(東學) - "동쪽의 학문"이라는 뜻으로, 서학(西學, 천주교)에 대응한 이름이었고,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 인내천)"를 가르쳤으며, 한울님을 모시고(시천주, 侍天主),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최제우가 동학을 만든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

세도정치의 부패 -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었고, 희망이 없었으며,

서양 세력의 침투 - 서학(천주교)이 확산되고, 서양 열강이 압박하고 있었으며,

민족 종교의 필요 - "우리만의 종교"가 필요했고, 유교·불교·도교를 융합했으며, 평등 사상이 핵심이었습니다.

최제우 초상화
최제우 초상화 / 출처 : 오마이뉴스

 

동학의 확산과 탄압

동학이 빠르게 퍼졌습니다. 몰락 양반, 농민, 상인들이 받아들였고, "사람이 평등하다"는 가르침이 매력적이었으며,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정이 탄압했습니다. "사교(邪敎)", "백성을 현혹한다", 1864 최제우를 체포했고, "혹세무민(惑世誣民)"죄로 처형했으며(대구에서 참수), 동학을 금지했습니다.

하지만 동학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최시형(崔時亨, 1827~1898) 2대 교주가 되어, 지하로 들어가 포교를 계속했고, 1880년대 더욱 확산되었으며, 수십만 명이 신자가 되었고, 특히 농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습니다. 1890년대 동학은 단순한 종교를 넘어 사회 운동이 되었습니다.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을 전개했고 -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어달라", "동학을 공인하라" 요구했으며, 수만 명이 집회를 열었고(보은 집회 등, 1893), 정치적 성격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 1894년 동학농민운동: 폭발하는 민중

조병갑의 탐학

전라도 고부(정읍) 군수 조병갑(趙秉甲)이 악질 관리였습니다.

불법 세금을 징수했고, 만석보(萬石洑)라는 저수지를 만들며 농민들에게 공사비를 받았고, 물 사용료까지 징수했으며, 부정부패가 극심했고, 농민들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이 나섰습니다. 몰락 양반 출신으로(아버지가 부당하게 죽음을 당함), 동학 접주(接主, 지역 지도자)였고, 키가 작았지만(150cm 정도) 카리스마가 있었으며, "녹두장군"으로 불렸습니다.

전봉준 체포 사진
전봉준 체포 사진 / 출처 : 동학혁명기념관

1894 1: 고부 봉기

1894 1 10, 전봉준이 농민들을 이끌고 고부 관아를 점령했습니다. 수천 명이 모였고, 조병갑이 도망갔으며, 만석보를 부수고, 곡식 창고를 열어 백성에게 나눠줬고, 부당하게 받은 세금을 돌려줬습니다. 하지만 조정이 진압군을 보냈고, 안핵사(按覈使) 이용태(李容泰)가 왔는데, 공정한 조사 대신 농민들을 탄압했고, 주모자를 체포하려 했으며, 농민들이 다시 봉기를 준비했습니다.

 

3: 무장 기포

1894 3 20, 전봉준이 무장(茂長, 지금의 고창)에서 재봉기했습니다. 무장 기포(茂長起包), 수천 명 농민군이 모였고, "보국안민(輔國安民)" -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기치를 내걸었으며,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 12개조를 발표했습니다:

  1. 동학도와 정부가 협력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
  2. 탐관오리를 엄징
  3. 횡포한 부호를 징벌
  4. 불량한 유림과 양반 배격
  5. 노비 문서 소각
  6. 7종 천민의 대우 개선
  7. 청상과부의 재가 허용
  8. 무명잡세 폐지
  9. 관리 채용의 공정성
  10. 왜적과 내통하는 자 엄징
  11. 공사채(公私債) 탕감
  12. 토지의 평균 분작

4~5: 황토현·전주성 전투

농민군이 승승장구했습니다.

4 7일 황토현(黃土峴) 전투 - 정읍에서 관군을 격파했고, 전봉준이 지휘했으며, 큰 승리였고,

4 27일 장성 전투 - 관군을 또 격파했으며,

5 11일 전주성 점령 - 전라도 관찰사가 도망갔고, 농민군이 전주를 장악했으며, 조정이 패닉에 빠졌습니다.

 

·일 군대 개입

조선 조정이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했습니다(5). "농민군을 막을 수 없다", 청나라군 3,000명이 아산만으로 들어왔고(6), 일본이 즉시 반응했습니다. "청나라가 왔으니 우리도 간다" (텐진조약 1885 - 조선 파병 시 상호 통보), 일본군 8,000명이 인천으로 들어왔으며(6), 조선이 청·일 각축장이 되었습니다.

 

전주화약: 1차 봉기 종료

전봉준이 판단했습니다. "·일이 개입하면 위험하다", "일단 물러나자", 6 11일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었습니다.

조정과 농민군이 협상으로, 폐정개혁을 약속받았고, 농민군이 전주에서 철수했으며, 집강소(執綱所) 설치했습니다 - 전라도 각 고을에 농민 자치 기구로, 개혁을 추진하고, 치안을 유지했으며, 새로운 사회 실험이었습니다.

 

1차 봉기의 전개도
1차 봉기의 전개도 / 출처 : 나무위키
2차 봉기의 전개도 / 출처 : 나무위키

 

⚔️ 청일전쟁: 조선을 두고 벌인 전쟁

1894 7: 전쟁 발발

농민군은 물러났지만 청·일 군대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일본이 야심을 드러냈습니다. "조선을 장악하겠다", "청나라 세력을 몰아내겠다",

7 23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고, 고종을 억류했으며, 친일 정권을 수립했고(김홍집 내각), 청나라 군대를 공격 준비했습니다.

7 25일 풍도해전 - 일본 해군이 청나라 함선을 기습 공격했고,

7 29일 성환 전투 - 충남 성환에서 일본군이 청나라군을 격파했으며,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의 압도적 승리

전쟁은 일본의 일방적 승리였습니다.

9월 평양 전투 - 일본군이 평양을 점령했고, 청나라군이 대패했으며,

9월 황해해전 - 일본 해군이 청나라 북양함대를 격파했고, 제해권을 장악했으며,

1895 2월 위해위(威海衛) 함락 - 청나라 북양함대가 전멸했고, 청나라가 항복을 요청했습니다. 왜 일본이 이겼을까요? 근대화 성공 - 메이지유신(1868년)으로 군대를 근대화했고, 무기가 우수했으며,

청나라 쇠퇴 - 서태후의 부패 정치로 군대가 약했고, 내부 부패가 심했으며,

전쟁 의지 - 일본은 필사적이었고, 청나라는 안일했습니다.

청일전쟁 주요 전투 지도
청일전쟁 주요 전투 지도 / 출처 : 나무위키

 

1895 4: 시모노세키 조약

1895 4 17,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시모노세키 조약(Treaty of Shimonoseki) 내용을 보면:

  • 조선의 독립 인정 -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종주권 포기 (일본의 의도)
  • 요동반도·타이완·팽호도 할양 - 청나라 영토를 일본에 넘김
  • 배상금 2억 냥 - 막대한 전쟁 배상금
  • 통상 특권 - 일본에 유리한 조항들

청나라가 완전히 굴복했고, 동아시아 질서가 바뀌었으며,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으로 부상했고, 조선은 청나라 영향에서 벗어났지만, 이제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갔습니다.

 

삼국간섭

조약 직후 삼국간섭(三國干涉)이 일어났습니다(4 23).

러시아·독일·프랑스가 일본에 압박했고,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돌려줘라", 일본이 어쩔 수 없이 반환했으며(대신 배상금 더 받음), 일본이 러시아를 원수로 여기게 되었고(10년 후 러일전쟁 원인), 조선에서 러시아 영향력이 커졌습니다.

 

📜 갑오개혁: 강요된 근대화 (1894~1896)

일본의 압력

청일전쟁 중 일본이 조선 정부를 장악했고(1894 7~), 친일 내각을 세웠으며(김홍집, 박영효 등), "조선을 근대화시킨다"며 개혁을 강요했고, 갑오개혁(甲午改革)이 시작되었습니다.

 

1차 갑오개혁 (1894 7~12)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 설치로 개혁을 추진했고, 주요 개혁 내용은:

 

정치

  • 과거제도 폐지 능력 위주 관리 등용
  • 의정부·6→ 8아문 체제로 (근대적 내각제)
  • 은본위제 화폐 개혁

사회

  • 신분제 폐지 (양반·상민·천민 구분 폐지)
  • 조혼 금지 (16세 이하 결혼 금지)
  • 과부 재가 허용
  • 연좌제 폐지

경제

  • 도량형 통일
  • 재정 일원화

군국기무소
군국기무처 / 갑오개혁을 추진하던 최고 정책결정 기관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차 갑오개혁 (1895)

홍범 14(洪範十四條) 발표 - 개혁의 기본 방향 제시했고, 추가 개혁:

  • 태양력(양력) 사용 (음력 폐지)
  • 소학교 설립 (근대 교육)
  • 단발령 시행 (상투 자르기)

개혁의 평가

긍정적

  • 신분제 폐지 평등 사회로 진전
  • 과거제 폐지 근대적 관료제
  • 교육 개혁 근대 교육 시작

부정적

  • 일본의 강요로 이루어짐 (자발적 아님)
  • 백성들의 반발 (특히 단발령)
  • 전통과의 급격한 단절
  • 일본 침략의 도구로 이용됨

🔪 1894년 가을: 동학농민군 2차 봉기

일본에 맞서다

전봉준이 다시 봉기했습니다(9). 일본군이 조선을 장악하고, 청일전쟁을 벌이고 있었으며, "항일(抗日) 투쟁"으로 성격이 바뀌었고, "일본군을 몰아내자!" 외쳤습니다. 전라도에서 다시 궐기했고, 북상하여 충청도로 진격했으며, 수만 명이 모였고, 북접(北接, 충청도 동학)과 연합했으며(남접·북접 연합), 서울로 진격했습니다.

 

우금치 전투의 패배

 

1894 11월 우금치(牛禁峙) 전투 - 충청도 공주 근처로, 농민군 최대 10만 명과 관군·일본군 연합이 맞섰고, 일본군의 근대식 무기(기관총 등), 농민군이 참패했으며, 수천~수만 명이 전사했고, 전봉준이 후퇴했습니다. 농민군이 흩어졌고, 일본군·관군이 잔혹하게 진압했으며, 수만 명을 학살했고, 12 전봉준이 체포되었습니다(순창에서).

 

1895 4: 전봉준 처형

1895 3~4, 전봉준이 재판을 받았습니다.

일본이 주도한 재판으로, 전봉준은 당당했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싸웠다", "잘못한 것 없다" 주장했지만, 4 24 교수형으로 처형되었습니다(한성 교외). 41세의 나이로, 손병희(孫秉熙) 등 다른 지도자들도 처형되거나 도망갔으며(손병희는 일본 망명), 동학농민운동이 끝났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의의

동학농민운동은 실패했지만 의미가 컸습니다.

민중의 각성 - 농민들이 스스로 일어났고, 자치를 실현했으며(집강소),

반봉건·반외세 - 봉건 체제와 외세에 맞섰고,

평등 사상 - 신분제 철폐를 주장했으며,

근대 민족운동의 시작 - 3·1운동, 독립운동으로 이어지고,

한계 - 근대적 무기가 없었고, 조직이 체계적이지 못했으며, 외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 1895년 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

명성황후와 친러정책

명성황후(明成皇后, 민비)가 실권을 쥐고 있었습니다(1873년 대원군 실각 후). 총명하고 정치력이 뛰어났으며, 청일전쟁 후 노선을 바꿨습니다. 일본이 너무 강해졌고, "러시아와 손잡자" 친러정책(親露政策)을 추진했으며, 러시아 공사와 가까이 지냈고, 일본을 견제하려 했습니다. 일본이 위협을 느꼈습니다. "명성황후가 방해물이다", "제거해야 한다", 끔찍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1895 10 8: 경복궁 침입

1895(고종 32) 10 8(음력 8 20) 새벽,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했습니다.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주도했고, 일본 낭인(浪人, 무사 출신 건달) 수십 명과, 훈련대 일부(일본이 조종)가 참여했으며, 왕궁을 습격한 것입니다. 명성황후를 찾아냈고, 칼로 살해했으며, 시신을 불태웠고(녹원, 鹿苑에서), 흔적을 없앴습니다.

 

경복궁 건청궁 내 옥호루 측면
경복궁 건청궁 내 옥호루 측면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을미사변(乙未事變) 또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었습니다.

왕비를 시해한 것으로, 국제법상 중대 범죄였고, 일본의 만행이었으며, 조선이 충격에 빠졌습니다. 고종이 공포에 떨었고, 왕비를 잃고 절망했으며, 일본이 자기들끼리 재판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처리했고(1896), 국제적 비난을 받았습니다.

 

단발령과 의병 봉기

을미사변 직후 일본이 단발령(斷髮令)을 강행했습니다(11).

"상투를 자르라", 근대화 명목이었지만, 유교 전통에서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 머리카락은 부모에게 받은 것이므로 자를 수 없었고, 백성들이 격렬히 반발했습니다.

을미의병(乙未義兵)이 일어났습니다.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켰고, "명성황후 원수를 갚자", "일본을 몰아내자", 전국에서 봉기했고, 유인석(柳麟錫), 이소응(李昭應) 등이 지휘했으며, 일본군과 친일 정부에 맞섰지만, 진압되었습니다.

 

🏃 1896년 아관파천: 러시아 공사관으로

고종의 탈출

고종이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왕비가 시해당했고, 일본이 궁궐을 장악했으며, "나도 죽을 수 있다" 두려워했습니다. 친러파 대신들이 계획을 세웠고(이범진, 이완용 등), 1896(건양 1) 2 11일 새벽, 고종이 궁궐을 탈출했습니다. 궁녀의 가마에 숨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갔으며, 세자(순종)도 함께였고, 아관파천(俄館播遷)이었습니다. "아관(俄館)"은 러시아 공사관이고, "파천(播遷)"은 왕이 난을 피해 도망감입니다.

고종이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렀습니다(1896.2~1897.2). 조선의 왕이 외국 공사관에 피신한 것으로, 국가 위신이 땅에 떨어졌지만, 일본의 위협에서 벗어났고, 친러파 정권을 수립했으며(김홍집 등 친일파 제거), 러시아 영향력이 급증했습니다.

구 러시아 공사관
구 러시아 공사관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러시아의 이권 침탈

러시아가 대가를 요구했습니다. 각종 이권을 넘겼고:

  • 삼림 벌채권
  • 광산 채굴권
  • 철도 부설권
  • 등등

열강들이 각축을 벌였고, 러시아·일본·미국·영국·프랑스·독일이 이권을 다투었으며, 조선이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습니다.

 

🏛️ 1897년 대한제국 수립

환궁과 황제 즉위

1897 2, 고종이 경운궁(慶運宮, 덕수궁)으로 환궁했습니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 만에, 새로운 궁궐로 거처를 옮겼고, 개혁을 준비했습니다.

1897 10 12, 고종이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원구단(圜丘壇)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고, 황제를 칭했으며, "대한제국(大韓帝國)" 수립을 선포했고,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했으며,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大韓)"으로 바꿨습니다.

고종(대한제국)
고종(대한제국) 사진 / 출처 : 나무위키

 

왜 황제를 칭했을까요?

자주 독립 선언 - 청나라의 속국이 아님을 천명했고, 황제는 독립국 군주이며,

국제적 지위 향상 - "우리도 제국이다", 일본·러시아와 대등하다고 주장했으며,

왕권 강화 - 황제 권력으로 개혁을 추진하려 했습니다.

 

대한제국 국제(國制)를 보면:

  • 국호: 대한제국 (大韓帝國)
  • 군주: 황제 (皇帝)
  • 연호: 광무 (光武, 1897~1907)
  • 수도: 한성 (漢城)
  • 국기: 태극기 (정식 채택)

광무개혁 (1897~1904)

고종이 광무개혁(光武改革)을 추진했습니다.

양전 사업 - 토지 조사를 체계적으로 실시했고, 근대적 지적제도 도입했으며, 광무양전(光武量田)으로 불렸고,

상공업 육성 - 회사 설립을 장려했고(대한천일은행 등), 산업을 근대화하려 했으며,

군사력 강화 - 원수부(元帥府) 설치로 고종이 대원수가 되었고, 군대를 증강했으며,

근대 시설 - 전차(電車, 1899년 개통), 전기, 전화 도입했고,

교육 확대 - 학교를 설립하고, 유학생을 파견했습니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습니다.

황제 권력 강화 위주 - 입헌군주제가 아니라 전제군주제로, 근대적 민주주의는 아니었고,

재정 부족 - 개혁에 필요한 돈이 부족했고,

열강 간섭 - 러시아·일본이 방해했으며,

시간 부족 - 7년 후 러일전쟁으로 중단되었습니다.

 

📰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서재필과 독립협회

1896,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이 미국에서 돌아왔습니다.

갑신정변(1884) 실패 후 미국 망명했다가, 11년 만에 귀국했고, 미국 시민권을 가진 의사였으며, 근대 민주주의 사상을 가졌습니다.

1896 7,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립했습니다.

이상재(李商在), 윤치호(尹致昊), 남궁억(南宮檍) 등이 참여했고, 개화 지식인들이 모였으며, "자주 독립"을 주장했습니다.

서재필과 독립협회 회원들
서재필과 독립협회 회원들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독립협회의 활동을 보면:

  • 독립문 건립 (1896): 영은문(迎恩門, 청나라 사신 맞이하던 문) 터에 독립문을 세웠고, 자주독립을 상징했으며, 지금도 서울에 있고,
  • 독립신문 발행 (1896.4): 한글 신문으로 (최초의 민간 한글 신문), 서재필이 주필이었고, 계몽 활동을 했으며,
  •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개최 (1898): 대중 집회로, 수천~수만 명이 모였고, 정치 개혁을 요구했으며, 의회 설립을 주장했고 (중추원을 의회로), 민권 신장을 외쳤습니다.

1898: 독립협회 해산

독립협회가 점점 급진적이 되었습니다.

황제 권력을 제한하려 했고, 의회 설립을 강력히 요구했으며, 보수파가 반발했고, 고종도 불안해했습니다("황권을 빼앗으려 한다").

1898 12, 고종이 독립협회를 강제 해산시켰습니다. 지도자들을 체포했고, 윤치호, 이상재 등이 투옥되었으며, 만민공동회를 금지했고, 3년 만에 끝났습니다. 하지만 독립협회의 정신은 계승되었습니다. 민권·자주·민주주의 사상이, 후대 독립운동으로 이어졌고, 근대 시민운동의 시초였습니다.

 

💭 에필로그: 대한제국의 짧은 꿈

1894~1904: 격동의 10

1894~1904 10년은 정말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 1894: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개혁
  • 1895: 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
  • 1896: 아관파천
  • 1897: 대한제국 수립
  • 1898: 독립협회 해산
  • 1904: 러일전쟁 발발

조선은 사라지고 대한제국이 되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열강이 이권을 다투었고, 일본과 러시아가 충돌 직전이었으며, 조선/대한제국은 제대로 된 힘이 없었고, 1904년 러일전쟁이 터졌고, 일본이 승리했으며,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겼고, 1910년 국권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역사적 평가

동학농민운동 - 민중의 자각과 저항으로, 반봉건·반외세 운동이었고, 근대 민족운동의 시작이었지만, 무기와 조직의 한계로 실패했습니다.

갑오개혁 - 신분제 폐지 등 근대적 개혁이었지만, 일본 강요로 이루어졌고, 자주적 근대화가 아니었으며,

대한제국 - 자주독립을 천명했고, 광무개혁을 추진했지만, 황제 전제 강화에 치중했고, 열강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독립협회 - 민주주의·민권 사상을 전파했고, 시민 계몽에 기여했지만, 보수 세력의 반발로 해산되었습니다.

결국 조선/대한제국은 근대화에 실패했습니다. 너무 늦었고, 힘이 없었으며, 내부 분열이 컸고, 열강의 침략을 막지 못했지만, 이 시기의 경험과 저항은 후대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되었고, 민족의식이 형성되었으며, 근대 국가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일제 강점기, 을사늑약, 헤이그 특사, 의병 투쟁, 그리고 1910년 국권 상실의 비극을 다루겠습니다.

 

🎯 핵심 정리

동학농민운동 타임라인

연도/날짜 사건 배경 및 의의
1860년 최제우, 동학(東學) 창시 서양 학문(서학, 천주교)에 대항하고 민족적 자각을 일깨우고자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핵심으로 창시.
1864년 최제우 처형 정부가 동학을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교주인 최제우를 처형.
1894년1월 고부 봉기
(조병갑 탐학)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이 직접적 원인. 만석보를 파괴하는 등 농민들의 최초 봉기.
1894년 3월 무장 기포 (전봉준) 전봉준 등이 전라도 무장에서 대규모로 봉기하여 본격적인 농민 운동의 시작을 알림 (1차 봉기).
1894년 4월 황토현 전투 승리 동학농민군이 관군과의 첫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세력 확장.
1894년 5월 전주성 점령 농민군이 호남의 중심지인 전주성을 점령. 이로 인해 정부는 청에 원군을 요청.
1894년 6월 전주화약 (和約) 체결, 집강소 설치 정부와 농민군이 화약을 맺고, 농민군 스스로 폐정개혁을 추진하는 집강소를 전라도 53개 군현에 설치. (청일전쟁 발발의 계기).
1894년 9월 2차 봉기 (항일)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내정 개혁에 간섭하자, 반외세(항일)를 기치로 내걸고 재봉기.
1894년 11월 우금치 전투 패배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군에 맞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으나, 근대 무기로 무장한 연합군에 패배하여 사실상 혁명이 좌절됨.
1894년 12월 전봉준 체포 순창 피노리에서 부하의 밀고로 전봉준 장군이 체포됨.
1895년 4월 전봉준 처형 정부와 일본에 의해 전봉준이 처형되면서 동학농민운동의 공식적인 막이 내림.

 

청일전쟁 vs 러일전쟁

구분 청일전쟁 (1894~1895) 러일전쟁 (1904~1905)
장소 조선·만주 만주·한반도
원인 조선 지배권 만주·조선 지배권
승자 일본 일본
조약 시모노세키 조약 포츠머스 조약
결과 청나라 영향력 소멸 일본의 조선 지배 확립

 

전봉준 (1855~1895)

출신: 전라도 고부, 몰락 양반

별명: 녹두장군 ( 150cm)

역할: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주장:

  • 보국안민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케)
  • 폐정개혁 12개조
  • 반봉건·반외세

최후: 1895 4 24일 교수형

 

동학농민운동 주요 전투

전투 날짜 결과
황토현 1894.4.7 농민군 승리
장성 1894.4.27 농민군 승리
전주성 1894.5.11 농민군 점령
우금치 1894.11 농민군 대패

 

폐정개혁안 12개조 (요약)

  1. 동학도-정부 협력
  2. 탐관오리 엄징
  3. 횡포한 부호 징벌
  4. 불량 양반 배격
  5. 노비 문서 소각
  6. 7종 천민 대우 개선
  7. 청상과부 재가 허용
  8. 무명잡세 폐지
  9. 관리 채용 공정
  10. 매국노 엄징
  11. 공사채 탕감
  12. 토지 평균 분작

갑오개혁 (1894~1896)

1차 개혁 (1894.7~12)

  • 과거제 폐지
  • 신분제 폐지
  • 8아문 체제
  • 은본위제

2차 개혁 (1895)

  • 홍범 14
  • 태양력 사용
  • 단발령
  • 소학교 설립

성격: 일본 강요, 근대화

 

을미사변 (1895.10.8)

피해자: 명성황후 (민비)

가해자: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 일본 낭인들

장소: 경복궁

방법: 칼로 살해 후 시신 소각

영향:

  • 을미의병 봉기
  • 반일 감정 극대화
  • 고종 공포

아관파천 (1896.2.11)

배경: 을미사변 후 고종 공포

내용: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

기간: 1 (1896.2~1897.2)

결과:

  • 친러 정권 수립
  • 러시아 영향력 증대
  • 왕권 실추

대한제국 (1897~1910)

수립: 1897 10 12

군주: 고종 황제

연호: 광무 (光武)

수도: 한성 (漢城)

개혁: 광무개혁

  • 양전 사업
  • 상공업 육성
  • 군사력 강화
  • 근대 시설 (전차 등)

한계:

  • 전제군주제
  • 재정 부족
  • 열강 간섭

멸망: 1910 8 29 (한일병합)

 

독립협회 (1896~1898)

창립자: 서재필

주요 인물: 이상재, 윤치호, 남궁억

활동:

  • 독립문 건립 (1896)
  • 독립신문 발행
  • 만민공동회 개최

주장:

  • 자주독립
  • 민권 신장
  • 의회 설립
  • 근대화

해산: 1898 12 (고종 명령)

 

주요 인물 비교

인물 역할 입장 최후
전봉준 동학 지도자 반봉건·반외세 1895 처형
명성황후 왕비 친러 1895 시해
서재필 독립협회 개화·민권 미국 망명
고종 황제 자주독립 시도 1907 강제 퇴위

 

시대 흐름

1894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1895 을미사변, 의병 봉기

1896 아관파천, 독립협회

1897 대한제국 수립

1904 러일전쟁

1905 을사늑약 (외교권 상실)

1910 한일병합 (국권 상실)

 

📚 참고 자료 및 더 알아보기

방문할 수 있는 곳

전봉준 유적지 - 전북 정읍 (고부 관아터, 황토현 전적지)

동학농민혁명기념관 - 전북 정읍

우금치 전적지 - 충남 공주

독립문 - 서울 서대문구

러시아 공사관 - 서울 중구 정동 (일부 현존)

덕수궁 - 서울 중구 (경운궁, 대한제국 궁궐)

원구단 - 서울 중구 (환구단, 고종 즉위식)

 

추천 도서

『동학농민혁명사』 /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 『대한제국은 근대 국가인가』 /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

영화/드라마

영화 『남한산성』 이후 이 시기 영화는 많지 않음

드라마 『명성황후』(2001~2002) - 이 시기 다룸

영화 『암살』(2015) - 일제강점기지만 독립운동

사진/영상 자료

대한제국 시기 사진들이 많이 남아있어 실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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