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1. 21. 11:00ㆍ역사 Detox_한국사를 알아보자/🏯 근세: 조선 시대
프롤로그: 1863년, 11세 소년이 왕이 되다
1863년(철종 14년) 12월 8일, 경복궁에서 기이한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불과 11세 소년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고종(高宗)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흥선군(興宣君) 이하응이라는 왕족이었지만, 변방에 밀려나 가난하게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그의 아들이 왕이 되었을까요?
왕비 조대비(趙大妃, 순원왕후)가 선택했습니다.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왕실 어른으로서 결정권을 가진 조대비가, "흥선군의 둘째 아들을 왕으로 삼는다" 선택했고, 왕족 중 나이가 어려 조종하기 쉬울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계산을 잘못했습니다.
11세 왕 뒤에 아버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있었습니다.
대원군은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아들이 어리니 내가 섭정한다", 26년간 조선을 좌지우지했으며, 개혁과 쇄국, 개항과 비극이 얽힌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대원군은 무엇을 했을까요?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경복궁을 중건하고, 서원을 철폐했지만, 통상을 거부하고, 프랑스·미국과 전쟁을 벌였으며, 결국 조선은 문을 열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도정치란 무엇인가?",
"대원군의 개혁은 성공했나?",
"왜 쇄국을 고집했나?",
"강화도조약은 어떻게 맺어졌나?",
"개항 이후 조선은?"
오늘은 조선 500년 역사의 마지막 장, 개혁과 개항의 격동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 세도정치: 권력의 사유화 (1800~1863년)
정조 이후의 몰락
정조가 1800년 급사한 후 조선은 급격히 쇠퇴했습니다. 어린 순조(純祖, 11세)가 즉위하자, 외척들이 권력을 장악했고,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시작되었습니다. 세도(勢道)는 "권세 있는 길"이라는 뜻으로, 소수 가문이 권력을 독점한 것이었습니다.
세도 가문들을 보면:
안동 김씨(安東金氏) - 순조의 장인 김조순(金祖淳) 가문으로, 60년 넘게 권력 독점했고, 순조·헌종·철종 시대 내내 세도를 부렸으며,
풍양 조씨(豊壤趙氏) - 순조 비 순원왕후(조대비) 집안으로, 안동 김씨와 권력 다툼했고,
반남 박씨(潘南朴氏) 등 - 일부 가문도 참여했지만, 주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양대 가문이 권력을 독점했습니다.
세도정치의 폐해
세도정치는 조선을 망쳤습니다.
부패 만연 - 관직 매매가 공공연했고, 돈으로 벼슬을 샀으며, 뇌물이 횡행했고,
삼정(三政)의 문란 - 전정(田政, 토지세): 불법 징수 만연, 군정(軍政, 군역세): 황구첨정(어린아이에게도 군포 징수), 백골징포(죽은 사람에게도 징수) 등, 환곡(還穀, 곡물 대여): 고리대로 변질, 이자율이 수십 배로,
민생 파탄 - 백성들이 살 수 없었고, 세금을 감당 못 해 도망갔으며, 도적이 창궐했습니다.
왕권 약화 - 왕은 허수아비였고, 외척이 모든 것을 결정했으며, 순조·헌종·철종 모두 꼭두각시였고,
국방 무력화 - 군대가 약해졌고, 외세에 대비하지 못했으며, 조선이 위기에 빠졌습니다.
민란의 시대
백성들이 더 이상 참지 못했습니다.
1811년 홍경래의 난 - 평안도에서 홍경래(洪景來)가 봉기했고, 지역 차별에 저항했으며(평안도는 과거 급제자가 적었음), 4개월간 정주성 등을 점령했다가, 진압되었지만 충격이 컸습니다.
1862년 임술민란 -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고, 삼정의 문란에 저항했으며, 진주, 단성, 함평 등 수십 곳에서 봉기했고, 관아를 습격했으며, 조선이 붕괴 직전이었습니다.
1863년 철종 승하
1863년 12월, 철종(哲宗)이 승하했습니다(33세, 재위 14년). 후사가 없었고, 왕실 어른 조대비(순원왕후)가 후계를 정해야 했으며, 왕족 중에서 선택해야 했습니다. 조대비는 풍양 조씨 집안이었고, 안동 김씨를 견제하려 했으며, 조종하기 쉬운 어린 왕을 원했고, 흥선군의 둘째 아들 이명복(李命福, 11세)을 선택했습니다.
1863년 12월 13일, 이명복이 즉위했습니다. 고종(高宗)이 된 것입니다(26대, 1863~1907년 재위). 하지만 실권은 아버지에게 있었습니다.
🎩 흥선대원군: 권력을 잡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누구인가?
이하응(李昰應, 1820~1898년)은 왕족이었지만 변방에 밀려난 인물이었습니다.
증조부가 영조의 아들(사도세자의 이복동생)로, 왕실 방계였고, 세도 가문에 밀려 가난하게 살았으며, 방탕한 척하며 숨어 지냈고(실제로는 야심을 숨김), 아들을 왕으로 만들 기회를 노렸습니다. 1863년 둘째 아들이 왕이 되자, 아버지에게 대원군(大院君) 칭호를 주었습니다. "왕의 아버지"라는 뜻으로(왕이 아닌 왕족의 아들이 왕이 될 때 그 아버지에게 주는 칭호), 흥선군에서 흥선대원군으로 승격했고,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대원군은 강력한 성격이었습니다. 개혁 의지가 강했고, 왕권 강화를 추구했으며, 외세를 극도로 싫어했고, 보수적이고 배타적이었습니다.

세도정치 타파
대원군이 첫 번째로 한 일은 세도정치를 깨는 것이었습니다.
안동 김씨 숙청 - 권력을 빼앗았고, 주요 직책에서 제거했으며, 재산을 몰수하기도 했고,
인재 고르게 등용 - 능력 위주로 뽑았고, 출신을 가리지 않았으며,
비변사(備邊司) 폐지 - 임진왜란 때 만들어진 기구로, 세도 가문의 권력 기반이었는데, 폐지하고 의정부를 복구했으며,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백성들이 환영했습니다. "썩은 세도정치를 끝냈다", 기대가 컸습니다.
경복궁 중건 (1865~1872년)
대원군의 대표적 사업은 경복궁 중건이었습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타(1592년), 270년간 방치되어 있었고, 대원군이 재건을 결정했습니다(1865년).
그 이유는
왕권의 상징 - 웅장한 궁궐로 왕권을 과시하고,
정통성 강화 - 조선 정궁을 복원하며,
민심 수습 - 대역사로 일자리 창출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많았습니다.
막대한 비용 - 당백전(當百錢, 100배 가치 화폐) 발행으로, 인플레이션 발생했고, 화폐가 폭락했으며,
원납전(願納錢) - 백성들에게 "자발적" 기부를 강요했고, 실제로는 강제 징수였으며,
강제 노역 - 전국에서 백성들을 동원했고, 고된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1872년 경복궁이 완성되었습니다. 7년 대공사로, 웅장하고 아름다웠지만, 백성들의 원성이 컸고, 재정이 파탄났으며, 민심이 돌아섰습니다.


서원 철폐 (1871년)
대원군이 서원(書院) 철폐를 단행했습니다(1871년).
서원은 선비들의 교육·제사 기관이었는데, 문제가 많았습니다. 전국에 600여 개가 난립했고, 세금 면제 특권을 누렸으며, 백성들을 수탈했고, 당쟁의 온상이었으며, 대원군이 47개만 남기고 철폐했습니다. 사액서원(왕이 편액을 내린 서원) 중 일부만 존속했고, 나머지는 모두 폐쇄했으며, 토지·재산을 몰수했습니다.
성과와 한계를 보면,
긍정적 - 특권 제거했고, 백성 부담 줄었으며, 당쟁 기반 약화했고,
부정적 - 유림(儒林, 선비들)의 반발이 컸고, "유교를 탄압한다" 비난받았으며, 정치적 지지 기반을 잃었습니다.
삼정 개혁 시도
대원군이 삼정(전정·군정·환곡)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호포제(戶布制) 시행을 추진했고 - 양반도 군포를 낸다(양반 특권 제거), 하지만 양반들의 반발로 제대로 시행 안 되고,
환곡 정비 - 부정부패를 줄이려 했지만, 근본적 해결은 안 됨으로,
토지 조사 - 은결(隱結, 숨긴 땅) 찾아내려 했으나,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개혁은 미완으로 끝났습니다. 기득권의 저항이 강했고, 재정이 부족했으며, 경복궁 중건으로 돈을 다 썼고, 근본적 변화는 이루지 못했습니다.
🚫 쇄국정책: 통상수교 거부
서양 세력의 접근
19세기 중반, 서양 열강이 동아시아로 밀려왔습니다.
중국 침탈 - 1840년대 아편전쟁으로 청나라가 영국에 패배했고, 1860년 베이징 함락(제2차 아편전쟁)으로, 서양 열강이 중국을 반식민지화했으며,
일본 개항 -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이 무력으로 일본을 개항시켰고(흑선 내항), 1854년 일본이 문을 열었으며,
조선 압박 - 서양 국가들이 조선과도 통상을 요구했습니다.
대원군의 입장은 명확했습니다.
절대 반대 - "양이(洋夷, 서양 오랑캐)와는 상대 안 한다", 통상 요구를 모두 거부했고,
쇄국정책 - 문을 굳게 닫았고, 천주교도 탄압했으며(서양 문물 차단),
강경 대응 - 서양 배가 오면 공격했고, 협상을 거부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1866년(고종 3년), 대원군이 천주교 대탄압을 시작했습니다. 병인박해(丙寅迫害)였습니다.
천주교가 조선에 확산되고 있었는데(18세기 말부터), 신자가 수만 명에 달했고, 프랑스 선교사들도 잠입해 있었으며, 대원군은 위협으로 봤습니다. "서양 사상이다", "유교를 위협한다", 탄압을 결정했고, 1866년 1~3월 대대적 체포·처형을 단행했습니다.
프랑스 선교사 9명을 처형했고(베르뇌, 브르트니에르 주교 등), 조선인 신자 수천 명을 죽였으며, 남종삼, 최형(崔炯) 등 지도자들이 순교했고, 참혹한 박해였습니다. 프랑스가 분노했습니다. "선교사를 죽였다", "보복하겠다", 원정군을 준비했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 프랑스 침공
1866년(고종 3년) 9~10월, 프랑스가 침공했습니다. 병인양요(丙寅洋擾)였습니다.
프랑스 극동함대 로즈(Roze) 제독이 군함 7척, 병력 1천여 명을 이끌고, 강화도를 공격했으며(9월 말), 강화도를 점령했습니다. 조선군이 제대로 막지 못했고, 프랑스군이 강화성을 점령했으며, 약탈을 자행했고(외규장각 도서 등), 보물을 약탈했습니다(『직지심체요절』, 『조선왕조의궤』 등, 2011년 일부 반환).
하지만 정족산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승리했습니다(10월 26일).
한성근(韓聖根), 양헌수(梁憲洙) 등이 지휘했고, 지형을 이용해 프랑스군을 격퇴했으며, 프랑스군이 철수했습니다(11월). 대원군은 승리로 선전했습니다. "서양 오랑캐를 물리쳤다!", 쇄국정책이 옳다고 확신했지만, 실제로는 위험한 신호였습니다.

1871년 신미양요: 미국 침공
1871년(고종 8년) 5~6월, 이번에는 미국이 침공했습니다. 신미양요(辛未洋擾)였습니다.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발단이었습니다. 미국 상선이 대동강으로 들어와 통상을 요구했는데, 조선이 거부하자 폭력을 행사했고, 평양 군민이 배를 불태웠으며(선원 전원 사망), 미국이 이를 구실로 삼았습니다.
1871년 5월, 미국 아시아함대 로저스(Rodgers) 제독이 군함 5척, 병력 1,230명으로, 강화도를 공격했고,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했으며, 광성보(廣城堡)를 공격했습니다(6월 10~11일).
광성보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조선군 수비대 약 600명이, 미군 함포 사격에 맞서 싸웠고, 어재연(魚在淵) 장군이 지휘했으며, 거의 전멸했습니다. 어재연과 동생 어재순 등이 전사했고, 수백 명이 전사했으며, 미군은 20여 명 사상자였고, 압도적 화력 차이를 보여줬습니다.
미군이 협상을 제의했지만, 대원군이 거부했고, 미군이 철수했으며(6월 말), 대원군은 또 승리로 선전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나중에 다시 온다" 다짐했고, 조선은 고립을 자초했습니다.

척화비 건립
병인양요, 신미양요 후 대원군이 척화비(斥和碑)를 세웠습니다(1871년).
"서양 오랑캐와 화친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전국 각지에 세웠고, 쇄국 의지를 천명했으며, 개항을 절대 반대한다는 표시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대착오였습니다. 세계는 변하고 있었고, 일본은 개항 후 빠르게 근대화하고 있었으며, 조선만 문을 닫고 있었고, 결국 강제로 문을 열게 됩니다.

👰 1873년 대원군 실각: 민비의 반격
민비(명성황후)의 등장
고종의 왕비 민비(閔妃, 1851~1895년)가 등장했습니다.
여흥 민씨 집안으로, 1866년 고종과 결혼했고(15세), 총명하고 정치적 야심이 있었으며, 대원군과 갈등했습니다. 시아버지 대원군이 권력을 독점했고, 민비는 불만이었으며, 고종도 성장하며 친정(親政)을 원했고, 민비와 손잡았습니다.
1873년 대원군 하야
1873년(고종 10년) 11월, 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났습니다.
고종이 친정을 선언했고(22세), "이제 스스로 정치하겠다", 민비가 배후에서 조종했으며, 민씨 일족이 권력을 장악했고, 대원군은 운현궁(雲峴宮)으로 물러났습니다.
대원군 실각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경복궁 중건 부담 - 백성들의 원성이 컸고, 재정 파탄을 초래했으며,
서원 철폐 - 유림의 반발로, 정치적 기반을 잃었고,
쇄국정책 - 개화파들이 불만을 가졌고,
왕·왕비와의 갈등 - 고종이 성장하며 독립을 원했고, 민비가 권력 다툼에서 승리했습니다.

민씨 정권과 개화 정책
민비 정권이 정책을 바꿨습니다.
개화 정책 - "세계가 변하고 있다",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 일본·청나라 사절단을 보내 견문을 넓혔고(수신사, 영선사 등),
친일·친청 외교 - 일본과 가까워지고, 청나라와도 관계를 강화했으며,
통상 개방 준비 - 개항을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원군은 반발했습니다. "나라를 망친다", 하지만 권력이 없었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 1876년 강화도조약: 강제 개항
운요호 사건
1875년(고종 12년) 9월, 일본이 도발을 시작했습니다. 운요호(雲揚號) 사건이었습니다.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 근해에 침입했고, "물을 얻으러 왔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도발이었고, 조선군이 발포했고(초지진), 일본이 "공격받았다"며 보복했으며, 영종도를 공격해 민가를 불태웠습니다. 일본이 강력히 항의했습니다. "조선이 먼저 쐈다", "배상하고 통상 조약을 맺어라", 무력 위협을 했고, 군함을 동원했습니다.
조선 조정이 혼란에 빠졌습니다.
개화파 - 박규수(朴珪壽), 김홍집(金弘集) 등이 "조약을 맺어야 한다", "일본이 이미 근대화했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주장했고,
척화파 - "절대 안 된다", "오랑캐와 조약 불가", 하지만 힘이 약했고, 결국 조약을 맺기로 결정했습니다. 일본이 너무 강했고, 청나라도 "조약을 맺어라" 권유했으며(청이 일본 견제 위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1876년 2월: 강화도조약 체결
1876년(고종 13년) 2월 27일,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또는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였습니다.
강화도 연무당에서 조인했고, 조선 대표: 신헌(申櫶), 윤자승(尹滋承), 일본 대표: 구로다 기요타카(黒田清隆) 등이었으며, 조선의 첫 근대적 조약이었습니다.
조약 내용을 보면:
- 제1관: "조선은 자주국이다" - 청나라의 영향에서 벗어나라는 뜻(일본의 의도)
- 제4관: 부산 외 2개 항구 개항 - 원산, 인천이 추가로 열림
- 제7관: 조선 연해 측량권 - 일본이 조선 해안을 마음대로 측량
- 제10관: 영사재판권 - 일본인이 조선에서 죄를 지어도 일본 영사가 재판 (불평등)
- 관세 규정 없음 - 무관세 또는 저율 관세 (불평등)
강화도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영사재판권으로 치외법권을 인정했고, 관세 자주권이 없었으며, 일본에 유리한 조항들이 많았고, 조선 최초의 근대 조약이지만, 굴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개항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500년 쇄국이 끝났고, 조선이 세계와 만나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개항 이후 추가 조약
강화도조약 이후 다른 나라들도 조약을 맺었습니다:
-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미국)
- 1883년 조영수호통상조약 (영국)
- 1883년 조독수호통상조약 (독일)
- 18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 (러시아)
-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 (프랑스)
모두 불평등 조약이었고, 조선이 반식민지화되어갔습니다.
💭 에필로그: 개항과 근대의 시작
개항의 충격
개항은 조선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물밀 듯이 밀려오는 서양 문물 - 전신, 전화, 전등, 기차, 서양 의복, 단발 등이 들어왔고, 전통 사회가 흔들렸으며,
불평등 무역 - 일본 상인들이 조선 시장을 장악했고, 면직물 등을 대량 수입해 조선 수공업이 타격을 입었으며, 쌀 등을 수출해 국내 식량 부족이 발생했고,
사회 혼란 - 전통과 근대의 충돌로, 보수파와 개화파가 대립했으며, 백성들이 혼란스러워했습니다.

개화파의 등장
개항과 함께 개화파(開化派)가 성장했습니다.
온건 개화파 -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으로, 점진적 개혁을 주장했고, 청나라와 협력하며(동도서기론, 東道西器論),
급진 개화파 -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등으로, 빠른 개혁을 원했고, 일본을 모델로 삼았으며, 두 파가 대립했습니다.
1882년 임오군란
1882년(고종 19년) 7월, 구식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임오군란(壬午軍亂)이었습니다.
신식 군대(별기군)만 우대받고, 구식 군인들은 차별받았으며, 13개월치 급료를 못 받았고, 받은 것도 모래 섞인 쌀이었으며,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군인들이 봉기했고, 일본인 교관을 죽이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했으며, 민비를 죽이려 했고(민비는 도망쳐 살아남음), 대원군을 다시 추대했습니다. 청나라가 군대를 보내 진압했고(3,000명),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해갔으며(텐진 유폐, 3년), 민비가 다시 권력을 잡았고, 청나라의 내정 간섭이 시작되었습니다.
1884년 갑신정변
1884년(고종 21년) 12월, 급진 개화파가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이었습니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이 주도했고, 일본 공사 다케조에(竹添)의 지원을 받았으며, 청나라 세력을 제거하고, 급진 개혁을 하려 했습니다.
12월 4일 우정국(郵政局) 낙성식 때 거사했고, 보수 대신들을 죽였으며, 고종을 보호하고, 개혁 정강(14개조)을 발표했습니다.
- 청나라 의존 탈피
- 문벌 폐지, 인민 평등권 확립
- 지조법(地租法) 개혁
- 내시부(內侍府) 폐지
- 등등
하지만 3일 천하로 끝났습니다(12월 4~6일).
청나라군이 개입했고(원세개 지휘), 일본군이 철수하며, 고종을 청나라가 구출했고, 정변 주역들이 일본으로 망명했으며(김옥균, 박영효 등), 참여자들이 처형되었습니다(홍영식 등). 개혁은 실패했고, 청나라의 영향력이 더 강해졌으며, 조선이 청·일 각축장이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말년
대원군은 1885년 청나라에서 돌아왔지만(3년 유폐), 권력은 회복하지 못했고, 민비와 계속 갈등했으며, 1894년 청일전쟁 때 잠시 재집권했지만(일본이 옹립), 얼마 안 가 물러났고, 1898년 78세로 사망했습니다. 조선 근대화의 갈림길에서, 개혁과 쇄국 사이에서 갈등했던 인물로, 역사적 평가가 엇갈립니다.
대원군 평가
흥선대원군을 어떻게 평가할까요?
공(功) - 세도정치를 타파했고, 왕권을 강화했으며, 일부 개혁(서원 철폐 등)을 단행했고, 병인양요·신미양요에서 물리쳤으며,
과(過) - 쇄국정책으로 근대화 기회를 놓쳤고, 경복궁 중건으로 재정 낭비하고 민심을 잃었으며, 천주교 박해로 수천 명을 죽였고, 시대를 읽지 못했으며,
종합 - 능력은 있었으나 시대착오적이었고, 개혁가이면서 보수주의자였으며, 조선 근대화를 지연시킨 책임이 있습니다.
개항 이후 조선은 격변의 시대로 들어갔습니다. 청나라와 일본의 각축, 러시아의 남하, 열강의 이권 침탈이 시작되었고, 30년 후(1910년) 나라를 잃게 되며, 하지만 개항은 불가피했습니다. 세계는 변하고 있었고, 고립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었으며, 조선은 근대와 만나야 했고, 그 시작이 1876년 강화도조약이었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조선의 마지막 시기,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개혁, 그리고 대한제국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겠습니다!
🎯 핵심 정리
흥선대원군 시대 타임라인
| 연도/날짜 | 사건 | 배경 및 의의 |
| 1800년 | 정조 승하, 세도정치 시작 | 조선 후기 왕권 강화의 상실, 안동 김씨 등 특정 가문이 권력을 장악하며 정치적 혼란과 삼정의 문란 심화. |
| 1820년 | 이하응(흥선대원군) 출생 | 훗날 고종의 아버지이자 실질적인 집권자로 등장. |
| 1863년 12월 | 철종 승하, 고종 즉위, 흥선대원군 집권 | 고종의 어린 나이를 이용하여 대원군이 섭정(攝政)을 시작하며 세도정치 종식 및 개혁 정치 추진. |
| 1865년~1872년 | 경복궁 중건 | 왕실의 권위 회복 시도. 막대한 재정 소모로 원납전 징수 등 민생에 부담 가중. |
| 1866년 1~3월 | 병인박해 |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 프랑스 선교사 처형으로 병인양요의 직접적인 원인 제공. |
| 1866년 9~10월 | 병인양요 (프랑스) |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 침략. 조선군이 정족산성 등에서 항전하여 프랑스군 격퇴. |
| 1871년 5~6월 | 신미양요 (미국) | 미국 함대가 통상 요구를 거부당하자 강화도 침략. 어재연 장군 등이 광성보에서 항전하였으나 패배. |
| 1871년 | 서원 철폐, 척화비 건립 | 서원 철폐를 통해 유림 세력 약화 및 국가 재정 확보. 척화비 건립을 통해 통상 수교 거부 정책(쇄국 정책) 의지를 전국에 천명. |
| 1873년 11월 | 대원군 실각, 민비(명성황후) 집권 | 고종의 친정(親政) 선포와 함께 명성황후 중심의 민씨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며 대원군 축출. |
| 1875년 9월 | 운요호 사건 | 일본 군함 운요호가 고의로 강화도 앞바다에 침입하여 무력 시위. 일본의 강제 개항을 위한 구실로 활용됨. |
| 1876년 2월 27일 | 강화도조약 (개항) |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일본이 강요하여 체결된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 조선이 개항함. |
| 1882년 7월 | 임오군란 | 구식 군인들의 차별 대우와 생활고에 대한 불만으로 발생한 군인들의 폭동. 민씨 정권 몰락, 대원군 재집권(잠시). |
| 1884년 12월 | 갑신정변 |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가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해 일으킨 정변. 3일 천하로 실패하고 청의 영향력 심화. |
| 1898년 | 대원군 사망 | 격동의 근대사를 이끌었던 주요 인물 중 한 명인 흥선대원군 생을 마감. |
세도정치 (1800~1863년)
주요 세도 가문
- 안동 김씨 (金氏)
- 풍양 조씨 (趙氏)
폐해
- 부패 만연 (관직 매매)
- 삼정의 문란 (전정·군정·환곡)
- 왕권 약화
- 민생 파탄
민란
- 1811년 홍경래의 난
- 1862년 임술민란
흥선대원군 개혁
| 정책 | 내용 | 평가 |
| 세도정치 타파 | 안동 김씨 제거 | ✅ 성공 |
| 경복궁 중건 | 7년 대공사 (1865~1872) | ❌ 재정 낭비, 민심 이반 |
| 서원 철폐 | 600→47개 | ✅ 특권 제거 / ❌ 유림 반발 |
| 삼정 개혁 | 호포제 등 | ❌ 미완, 실패 |
| 쇄국정책 | 통상 거부 | ❌ 근대화 지연 |
병인양요 vs 신미양요
| 구분 | 병인양요 (1866) | 신미양요 (1871) |
| 국가 | 프랑스 | 미국 |
| 원인 | 병인박해 (선교사 처형) | 제너럴셔먼호 사건 |
| 규모 | 군함 7척, 병력 1천 | 군함 5척, 병력 1,230명 |
| 전투 | 정족산성 (양헌수) | 광성보 (어재연) |
| 결과 | 프랑스 철수 | 미국 철수 |
| 약탈 | 외규장각 도서 등 | 수기(帥字旗) 등 |
강화도조약 (1876.2.27)
배경: 운요호 사건 (1875.9)
주요 내용:
- 제1관: 조선은 자주국
- 제4관: 부산·원산·인천 개항
- 제7관: 조선 연해 측량권
- 제10관: 영사재판권 (치외법권)
- 관세 규정 없음
성격:
- 조선 최초 근대 조약
- 불평등 조약
- 일본에 유리
의의:
- 쇄국 종료
- 개항 시작
- 근대화의 출발점
임오군란 (1882) vs 갑신정변 (1884)
| 구분 | 임오군란 | 갑신정변 |
| 주체 | 구식 군인 | 급진 개화파 |
| 원인 | 차별 대우, 급료 체불 | 청나라 간섭 반발 |
| 성격 | 반개화, 반일 | 친일, 개혁 |
| 지도자 | 대원군 추대 | 김옥균, 박영효 등 |
| 결과 | 청나라 개입, 진압 | 3일 천하, 실패 |
| 영향 | 청의 내정 간섭 강화 | 청·일 각축 심화 |
개화파 분류
온건 개화파 (동도서기론)
- 인물: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 노선: 점진적 개혁
- 후원: 청나라
- 주장: 전통 유지 + 서양 기술
급진 개화파
- 인물: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 노선: 급진적 개혁
- 후원: 일본
- 주장: 서양식 근대화
개항 후 조약 체결
1876년 - 강화도조약 (일본)
1882년 - 조미수호통상조약 (미국)
1883년 - 조영조약 (영국), 조독조약 (독일)
1884년 - 조러조약 (러시아)
1886년 - 조불조약 (프랑스)
→ 모두 불평등 조약
대원군 평가
개혁가로서
- 세도정치 타파 ✅
- 서원 철폐 ✅
- 삼정 개혁 시도 △
한계
- 쇄국정책 고집 ❌
- 경복궁 중건 낭비 ❌
- 천주교 박해 ❌
- 시대 인식 부족 ❌
종합: 능력 있으나 시대착오적
📚 참고 자료 및 더 알아보기
방문할 수 있는 곳
경복궁 - 서울 종로구 | 대원군이 중건 (1865~1872)
강화도 - 인천 강화군 | 병인양요·신미양요·강화도조약 현장
광성보 - 인천 강화군 | 신미양요 격전지, 어재연 장군
운현궁 - 서울 종로구 | 흥선대원군 사저
국립고궁박물관 - 고종·대원군 시대 유물
외규장각 - 프랑스 국립도서관 (약탈 도서 일부 2011년 반환)
추천 도서
『고종시대의 재조명』 / 『흥선대원군』(이선근) / 『개화파와 개화사상 연구』 /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드라마/영화
드라마 『명성황후』(2001~2002) - KBS / 이미연(명성황후), 유동근(대원군)
영화 『덕혜옹주』(2016) / 손예진 / 대한제국 말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2018) - tvN / 개화기 배경
사진 자료
대한제국 시기 사진들이 남아있어 실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 포스팅 예고: 🌾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조선의 마지막 몸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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