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 vs 설총 — 신라의 학자들은 무엇을 남겼을까

2026. 5. 12. 09:52역사 Detox_한국사를 알아보자

최치원 설총 비교 신라 학자 역사 썸네일

 

신라에도 위대한 학자들이 있었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대, 한반도에는 뛰어난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최치원설총은 신라 학문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인물입니다.

두 사람은 살았던 시대도, 남긴 업적도 조금 다릅니다. 하지만 신라의 학문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지금부터 두 학자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최치원 — 당나라를 놀라게 한 신라의 문장가

최치원 신라 문장가 유학 설명 이미지

 

최치원(857~?)은 통일신라 후기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문장가입니다.

그는 열두 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외국 땅에서 혼자 공부한 그는 18세에 당나라 과거인 빈공과(賓貢科) 에 합격했습니다. 신라인으로서 이룬 놀라운 성취였습니다.

당나라에서 관리로 일하면서 그는 수많은 글을 남겼습니다.

특히 황소의 난 때 쓴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 은 당나라 사람들도 감탄한 명문장으로 전해집니다.

귀국 후에는 진성여왕에게 개혁안인 시무 10여 조를 올리며 나라를 바로잡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신라는 이미 혼란에 빠져 있었고, 그의 뜻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최치원은 관직을 버리고 각지를 떠돌다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그가 남긴 문집 『계원필경(桂苑筆耕)』 은 현재까지 전해지는 한국 최고(最古)의 개인 문집 중 하나입니다.


설총 — 한글 이전, 우리말을 지킨 학자

설총 이두 신라 교육 학자 설명 이미지

 

설총(655~?)은 원효대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이두(吏讀) 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이두는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식입니다. 한글이 만들어지기 훨씬 전부터 사람들은 이두를 사용해 우리말을 기록했습니다. 설총은 이 이두를 정리하고 발전시켜, 더 많은 사람이 글을 쓸 수 있게 했습니다.

또한 그는 신문왕에게 「화왕계(花王戒)」 라는 이야기를 지어 올렸습니다. 꽃들의 왕인 모란을 통해 임금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이야기 형식으로 간언한 글입니다. 유학의 도덕 정치 이념을 담은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설총은 경전을 가르치는 유학 교육에도 힘썼습니다. 우리 말과 글, 그리고 유학 교육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문묘(文廟)에 배향되었습니다.


두 사람을 비교해보면

최치원과 설총은 어떤 점이 같고, 어떤 점이 다를까요?

공통점은 분명합니다. 두 사람 모두 유학을 공부했고, 신라의 학문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후 세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도 같습니다.

차이점도 뚜렷합니다.

최치원은 한문학과 문장 에 집중했습니다. 당나라에서 인정받은 글솜씨로 신라 한문학의 수준을 높였습니다.

설총은 교육과 이두 에 집중했습니다.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법을 다듬고, 더 많은 사람에게 학문을 전하는 데 힘썼습니다.

한 사람은 밖에서 실력을 증명했고, 다른 한 사람은 안에서 토대를 쌓았습니다.

최치원 vs 설총

활동 시기 통일신라 후기 (9세기) 통일신라 전기 (7세기)
핵심 업적 한문학·문장 이두 정리·유학 교육
대표 작품 『계원필경』, 토황소격문 화왕계
특징 당나라 과거 합격 원효의 아들, 문묘 배향

신라의 두 학자가 남긴 것

최치원과 설총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신라의 학문을 발전시켰습니다.

최치원은 뛰어난 문장으로 신라 지식인의 수준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설총은 우리말과 글의 토대를 다지며 학문이 더 많은 사람에게 닿을 수 있게 했습니다.

두 사람의 이름이 지금까지 기억되는 이유는, 그들이 남긴 것이 단순한 글이 아니라 시대를 넘는 학문의 씨앗 이었기 때문입니다.


본 글은 국사편찬위원회 및 한국민족문화대백과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