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 vs 강감찬 — 고려는 어떻게 거란을 막아냈을까

2026. 5. 7. 10:22역사 Detox_한국사를 알아보자

서희 강감찬 비교 고려 거란 전쟁 역사 썸네일

 

1. 도입 — 위기의 고려, 두 영웅의 등장

10세기 말부터 11세기 초, 고려는 북방의 강대국 거란(요나라)으로부터 세 차례 큰 침입을 받았습니다.

거란은 당시 동아시아를 호령하던 강력한 유목 제국이었습니다.

고려 입장에서는 국가의 존망이 걸린 위기였습니다.

이 위기를 막아낸 두 인물이 있습니다.

말 한마디로 영토를 되찾은 서희(942~998)와, 전장에서 거란군을 궤멸시킨 강감찬(948~1031)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고려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 두 방식이 합쳐져 고려는 거란의 위협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2. 서희 — 말로 영토를 얻다

서희 강동6주 외교 담판 설명 이미지

외교 담판

993년, 거란의 1차 침입이 시작됐습니다.

거란 장수 소손녕은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 국경을 넘었습니다.

고려 조정은 크게 흔들렸습니다. 일부 신하들은 땅을 내주고 항복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이때 서희가 나섰습니다.

그는 적진으로 직접 찾아가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습니다.

소손녕의 요구는 두 가지였습니다.

"고려는 옛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있으니 우리에게 돌려라. 그리고 송나라와 교류를 끊고 거란을 섬겨라."

서희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우리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다. 오히려 압록강 북쪽 땅이 우리 영역이다. 거란과 교류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족이 그 사이를 막고 있기 때문이다. 여진을 몰아내면 거란과 교류하겠다."

서희의 논리 앞에 소손녕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결국 거란은 군대를 물렸습니다.

강동 6주 확보

더 놀라운 결과가 뒤따랐습니다.

서희는 담판의 결과로 압록강 동쪽 땅, 즉 강동 6주를 고려 영토로 확보했습니다.

흥화·용주·통주·철주·귀주·곽주, 이 여섯 지역입니다.

전쟁에서 이기지 않고도 오히려 영토를 늘린 것입니다.

강동 6주는 이후 고려의 북방 방어에 핵심적인 거점이 됩니다.

단 한 번의 협상으로 전쟁을 막고 땅까지 얻은 서희의 외교는 한국사에서 손꼽히는 명장면으로 기록됩니다.


3. 강감찬 — 전장에서 거란을 끝내다

강감찬 귀주대첩 고려 장군 설명 이미지

귀주대첩

외교로 1차 침입을 막았지만, 거란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2차(1010년), 3차(1018년) 침입이 이어졌습니다.

특히 3차 침입은 거란 장수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대군이었습니다.

이때 고려의 총사령관으로 나선 인물이 강감찬입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71세였습니다.

강감찬은 먼저 흥화진 전투에서 강물을 막았다가 한꺼번에 터뜨리는 전술로 거란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거란군은 개경까지 밀고 내려왔지만, 보급이 끊기고 병력이 소진된 상태였습니다.

결국 퇴각을 시작한 거란군을 강감찬은 귀주(현재 평안북도 구성)에서 포위했습니다.

1019년 귀주에서 벌어진 전투, 이것이 바로 귀주대첩입니다.

군사적 승리

고려군은 퇴각하는 거란 10만 대군을 사방에서 압박했습니다.

전투 결과는 압도적이었습니다.

거란군 중 살아서 돌아간 병사는 수천 명에 불과했다고 기록됩니다.

10만 대군이 사실상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것입니다.

귀주대첩은 살수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한국 3대 대첩으로 꼽힙니다.

이 승리 이후 거란은 다시는 고려를 침략하지 않았습니다.

강감찬이 개선할 때 현종은 직접 영파역까지 나가 그를 맞이했다고 전해집니다.


4. 비교 — 다른 무기, 같은 목표

공통점

서희와 강감찬은 모두 고려가 가장 위험했던 순간에 나타났습니다.

두 사람 모두 강대국 거란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고려는 국가의 독립과 영토를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차이점

 

주요 수단 외교 담판 군사 작전
핵심 사건 거란 1차 침입 (993년) 거란 3차 침입 (1018~1019년)
결과 강동 6주 확보 귀주대첩 승리
방식 논리와 협상 전략과 전투
성격 문신 외교관 무신 사령관

서희가 전쟁을 막은 사람이라면, 강감찬은 전쟁을 끝낸 사람입니다.

서희의 외교가 없었다면 강동 6주라는 방어 거점도 없었을 것입니다.

강감찬의 군사적 승리가 없었다면 거란의 위협은 계속됐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역할은 서로를 완성시켜 주는 관계였습니다.


5. 정리 — 고려가 살아남은 이유

고려는 작은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외교로 협상하고, 군사로 싸우고, 그 두 가지를 모두 해낼 수 있는 나라였습니다.

서희는 책상 위에서, 강감찬은 전쟁터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나라를 지켰습니다.

거란이라는 거대한 위협 앞에서 고려가 끝내 무너지지 않은 것은 이 두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서희와 강감찬을 함께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본 글은 국사편찬위원회 및 한국민족문화대백과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