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와 6월 항쟁] 민주주의를 향한 피의 투쟁 (1979~1987)

2025. 12. 5. 11:00역사 Detox_한국사를 알아보자/🇰🇷 현대: 광복 이후

프롤로그: 1987 6 10, 최루탄 가스 속의 함성

1987(단기 4320) 6 10일 수요일 오후 6, 서울 도심이 최루탄 가스로 뒤덮였습니다.

명동성당 앞, 시청 앞, 종로, 을지로 곳곳에서 수십만 명의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넥타이를 맨 직장인, 교복을 입은 학생, 주부, 노동자, 심지어 중학생까지...

"호헌 철폐!", "독재 타도!", "직선제 개헌!" 함성이 서울 하늘을 뒤흔들었고, 경찰이 최루탄을 쏘아댔지만, 사람들은 물러서지 않았으며,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서로를 부축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고, 온 국민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6월 민주항쟁(六月民主抗爭) 또는 6·10 민주항쟁이었습니다.

1987 6 10일부터 29일까지 전국에서 벌어진 대규모 민주화 운동으로, 수백만 명이 참여했고, 결국 독재 정권을 굴복시켰으며,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고, 한국 민주주의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길은 험난했습니다. 1979 10·26 이후, 또 다른 군부가 집권했고(전두환), 1980 5월 광주에서 시민들이 학살당했으며(5·18), 7년간 군부 독재가 계속되었고, 수많은 사람이 고문당하고 죽었으며, 그리고 1987 6, 마침내 민주주의를 쟁취했습니다.

 

"박정희 사후 무슨 일이?",

"12·12는 무엇인가?",

"5·18 광주는 왜 일어났나?",

"전두환은 어떻게 집권했나?",

"87 6월은 무엇이었나?"

 

오늘은 군부 독재와 민주화 투쟁의 8(1979~1987), 피로 쓴 민주주의 역사를 들려드리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 시위 장면
1987년 6월 항쟁 시위 장면 / 출처 : Moneys

🎖️ 1979 12: 신군부의 등장

박정희 사후 혼란

1979년 10월 26 박정희가 서거한 , 대한민국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국무총리 최규하(崔圭夏)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고(10 27),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었으며, 정치가 불안정했지만, 국민들은 기대했습니다.

"이제 민주화가 되겠지", "유신이 끝났으니",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해빙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왔고, "유신 잔재 청산!", "전두환 퇴진!", "계엄령 해제!" 시위를 벌였으며, 야당이 활기를 띠었고, 언론이 조금 자유로워졌으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전두환과 하나회

하지만 군부 내에서 새로운 세력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전두환(全斗煥, 1931~2021)이 중심이었습니다. 경남 합천 출신으로, 육군사관학교 11기로, 베트남 참전 경력이 있었고, 1979년 당시 보안사령관이었으며(육군 소장), 10·26 사건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박정희 시해 사건을 수사했고,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왔습니다.

전두환 주변에 하나회(一心會)라는 사조직이 있었습니다.

육사 출신 장교들의 비밀 모임으로(11기 중심), 노태우·정호용·유학성 등이 핵심이었고, 군부 내 사조직이었으며(불법), 서로를 지원하며 승진했고, 권력을 장악하려 했습니다.

10.26 사건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하는 전투환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1979년 10월 28일 촬영분 / 출처 : 나무위키

1979 12 12: 12·12 사태

1979 12 12일 밤,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12·12 사태 또는 12·12 군사반란으로, 전두환 등 신군부가, 계엄사령관 정승화 대장을 체포했습니다.

"10·26 사건에 연루되었다", 영장도 없이 불법 체포했고, 수도경비사령부(윤성민 소장)가 저항했지만, 신군부가 무력으로 제압했으며, 청와대 경호실과 교전까지 벌어졌고, 서울 곳곳에서 총성이 울렸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이 무력했습니다. 신군부의 압박에 굴복했고, 정승화 체포를 사후 승인했으며, 사실상 쿠데타였습니다. 전두환이 실권을 장악했고, 보안사령관에서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권력의 핵심이 되었으며, 신군부가 등장한 것입니다.

 

1980년 봄: 긴장 고조

1980년 초, 전두환이 권력을 강화했습니다.

중앙정보부장 서리(1), 보안사령관 겸직, 군부를 장악했고, 국민들이 반발했습니다.

"또 군부 독재냐", "민주화를 원한다", 학생·시민·노동자가 시위를 벌였으며, 1980 5, 전국적으로 민주화 요구가 폭발했습니다.

대학가에서 연일 시위가, "계엄령 해제!", "전두환 퇴진!", "민주화 실현!" 외쳤고, 서울대·고려대·연세대 등에서, 수만 명이 거리로 나왔으며, 5 15, 서울역 광장에 10만 명이 모였고, "민주화 대행진"을 벌였으며, 정권이 위기에 빠졌습니다.

 

🔴 1980 5: 광주의 비극

5 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신군부가 강경 대응을 결정했습니다.

1980 5 17일 밤,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습니다(제주도 포함). 국회를 폐쇄했고, 정당 활동을 금지했으며, 대학을 폐쇄했고, 언론을 완전 통제했으며, 야당 정치인을 체포했습니다.

김대중(金大中), 김영삼(金泳三) 등 재야·야당 인사를 연행했고, 김대중을 내란 음모로 체포했으며(5 18일 새벽), 사실상 쿠데타를 완성했습니다.

비상계엄 확대 선포
비상계엄 확대 선포 / 출처 : 나무위키

 

5 18: 광주에서 시작된 저항

1980 5 18일 일요일 아침, 전남 광주에서 학생들이 거리로 나왔습니다.

전남대·조선대 학생들이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며, 시위를 시작했고, 계엄군(공수부대)이 출동했습니다. 하지만 계엄군이 과잉 진압했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이 무차별 폭행을 가했고, 곤봉으로 학생들을 때렸으며, 대검(총에 달린 칼)으로 찔렀고, 피가 낭자했으며, 여학생도 가리지 않고 때렸고, 시민들이 분노했습니다.

5 19~20, 시위가 확대되었습니다. 시민들이 학생들을 지지하며, 함께 시위에 참여했고,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했으며, 금남로(광주 중심가)가 시위대로 가득 찼고, 계엄군이 더욱 잔인하게 진압했으며, 공수부대가 무차별 발포했고, 시민들이 쓰러졌습니다.

5.18 시위대를 진압하는 계엄군
5.18 시위대를 진압하는 계엄군 / 출처 :나무위키

 

5 21: 집단 발포

1980 5 21일 오후 1, 계엄군이 집단 발포를 시작했습니다.

금남로 전일빌딩 앞에서, 헬기와 지상에서 동시에,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았고, M16 소총으로 실탄을 발사했으며, 수십 명이 즉사했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으며, 피로 물든 금남로가 되었습니다.

시민들이 무장했습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예비군 무기고·경찰서에서 총기를 가져왔으며, 시민군을 조직했고, 계엄군과 맞섰습니다.

5 21일 밤, 계엄군이 광주에서 철수했습니다. 시민군의 저항에 밀려, 외곽으로 후퇴했고, 광주를 포위했으며,

5 22~26, 광주가 고립되었습니다.

"해방 광주" 또는 "절대 공동체"라 불렸고, 시민들이 스스로 질서를 유지했으며, 주먹밥을 나눠 먹고, 헌혈에 줄을 섰으며, 시민군이 치안을 담당했고, 하지만 외부와 차단되었습니다. 전화가 끊기고, 도로가 봉쇄되었으며, 언론이 왜곡 보도했고("폭도", "무장 난동"), 전국에 진실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5 27일 새벽: 최후의 항전

1980 5 27일 새벽 4, 계엄군이 최종 진압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전남도청을 향해 진격했고,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워, 시민군을 공격했으며, 도청을 사수하던 시민군 200여 명과, 최후의 전투를 벌였고, 새벽 5, 전남도청이 함락되었습니다. 시민군이 전멸하다시피 했고, 수십 명이 현장에서 사망했으며, 생존자들이 체포되었고, 광주가 진압되었습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전남도청 일대를 장학한 모습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전남도청 일대를 장학한 모습 / 출처 : 인천투데이

5·18의 희생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공식 희생자는:

  • 사망: 165 (공식 집계, 실제는 더 많을 것)
  • 부상: 3,139
  • 행방불명: 76
  • 구속: 1,589

하지만 진실은 아직도 규명 중입니다.

집단 매장지 발견으로, 실제 사망자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되고, 헬기 사격이 있었는지, 성폭행이 있었는지, 진상 규명이 계속되고 있으며, 누가 발포 명령을 내렸는지, 전두환이 주도했는지, 미국은 알고 있었는지, 논란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망월동에서 진행된 장례식(좌) 과 독일 슈피겔지에 실려 5.18의 실상을 세계에 알린 아버지의 영정을 든 아이 사진
망월동에서 진행된 장례식(좌) 과 독일 슈피겔지에 실려 5.18의 실상을 세계에 알린 아버지의 영정을 든 아이 사진 / 출처 : 5.18 기념재단

 

5·18의 의미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큰 의미를 갖습니다.

시민들이 무장하여 저항 - 국가 폭력에 맞섰고, 민주주의를 지키려 했으며,

절대 공동체 - 위기 속에서 연대했고, 인간의 존엄을 지켰으며,

민주화의 씨앗 - 5·18 정신이 이후 민주화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고, 1987 6월 항쟁으로 이어졌으며,

트라우마 - 광주 시민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지금도 치유 중이며,

진상 규명 - 40년이 지난 지금도,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 1980~1987: 5공화국 독재

전두환 집권

5·18을 진압한 후, 전두환이 본격적으로 집권했습니다.

1980 8, 최규하를 압박해 사임시켰고,

8 27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간접선거), 국민이 뽑지 않은 대통령이었고,

1981 2, 개헌을 통과시켰습니다(국민투표 95.5% 찬성). 대통령 임기 7년 단임제로, 선거인단 간접선거로,

5공화국이 출범했고,

3 312대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정식).

11대 전두환 전 대통령 취임식
11대 전두환 전 대통령 취임식 / 대통력 기록관

3S 정책

전두환 정권이 3S 정책으로 국민을 우민화했습니다:

  • Sports(스포츠) - 프로야구 출범(1982), 프로축구 출범, 86 아시안게임·88 올림픽 유치로, 스포츠로 국민의 관심을 돌림
  • Screen(영화·TV) - 컬러TV 보급, 프로그램 확대, 연예·오락 프로그램 장려로, 오락으로 정치 무관심 유도
  • Sex(성 산업) - 유흥업소 묵인, 성 산업 확대

"빵과 서커스"로 국민을 통제하려 했고,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했으며, 하지만 민주화 열망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언론 통제와 탄압

전두환 정권이 언론을 철저히 통제했습니다.

1980년 언론 통폐합 - 신문사·방송사를 강제로 통폐합했고, 언론인 933명을 해직시켰으며, KBS가 정부 대변인이 되었고, 비판적 언론을 없앴으며,

보도지침 - 언론에 매일 지침을 내렸고, 무엇을 보도하고 말지 지시했으며, 검열이 일상화되었고,

야당·재야 탄압 - 김대중을 사형 선고했다가(후에 감형), 미국 망명 보냈고(1982), 김영삼을 가택 연금했으며, 학생·노동자·종교인을 체포·고문했고,

삼청교육대(1980) - "사회 정화"라는 명목으로, 불량배·조직폭력배를 잡는다며, 6만여 명을 영장 없이 체포해, 군부대에서 가혹 행위를 가했고, 일반 시민도 많이 포함되었으며, 수십 명이 죽거나 불구가 되었고, 국가 폭력이었습니다.

 

경제 정책

전두환 정권도 경제 발전을 내세웠습니다.

물가 안정 - 인플레이션을 잡았고, "물가 안정이 최고의 복지"라 주장했으며,

부동산 안정 - 부동산 투기를 억제했고(토지공개념 등),

올림픽 특수 - 88 서울올림픽 준비로, 건설·관광 붐이 일었고, 경제 성장도 이어졌습니다.

1980년대 중반 연평균 10% 성장했고, 무역 흑자를 기록했으며(1986년 처음), 1인당 GNP 3,000달러 돌파(1987), "3저 호황"(저유가·저금리·저달러)의 혜택을 받았고, 하지만 빈부 격차는 여전했고, 민주주의는 후퇴했으며, 경제 발전이 독재를 정당화할 수 없었습니다.

 

부정부패

전두환 일가의 부패가 심각했습니다.

측근들이 권력을 남용했고, 뇌물을 받았으며, 전두환의 친인척이 특혜를 받았고, "이순자(李順子, 영부인) 왕국", "전두환 일가 비리" 등으로, 언론은 보도하지 못했지만, 소문이 돌았고, 국민들이 분노했습니다. 퇴임 후 비자금 수천억 원이 드러났고(1995), 처벌받았습니다.

 

🕯️ 1980년대 민주화 운동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 (1982)

1982 3 18, 부산 미국문화원이 방화되었습니다.

대학생들이 "미국이 5·18을 묵인했다", "미국도 책임이 있다" 주장하며, 미문화원에 불을 질렀고(문부식·김은숙·김현장), 반미 감정이 표출된 것으로, 5·18의 트라우마가 반미로 이어졌습니다.

 

학생 운동의 고조

1980년대 내내 대학가에서 시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매년 3(개강), 5(5·18), 10(유신 선포일) 등에,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학생들이 "독재 타도!", "민주화 실현!", "전두환 퇴진!" 외쳤으며, 경찰이 최루탄으로 진압했고, 대학이 최루탄 가스로 뒤덮였으며, 수많은 학생이 구속되었습니다.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1986)

1986 6, 충격적인 사건이 폭로되었습니다.

부천경찰서에서 여대생 권인숙이 성고문을 당했고, 조사 과정에서 경찰이 성폭행을 가한 것으로, 국민들이 경악했고, 정권의 야만성이 드러났으며, 민주화 운동에 불을 지폈습니다.

 

건국대 사건 (1986)

1986 9, 건국대학교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습니다.

경찰이 교내로 진입해, 1,500명을 연행했고(대학 역사상 최대 연행), 국민들이 분노했으며, 대학의 자율성이 침해되었고, 10~11월 전국 대학에서, 민주화 시위가 폭발했습니다.

 

🔥 1987: 결정적인 해

박종철 고문치사 (1987 1)

1987 1 14, 서울대생 박종철(朴鍾哲, 21)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당해 사망했습니다.

경찰이 조사 과정에서, 물고문을 가했고, "!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고 거짓 발표했으며, 단순 쇼크사라고 발표했지만, 진실이 밝혀졌습니다. 가톨릭 신부들이 부검을 요구했고, 중앙일보 기자가 취재했으며, 고문치사로 드러났습니다.

국민들이 경악했습니다. "21세 대학생을 고문해 죽였다", 분노가 폭발했고, 2 7 고문 치사 조작 사실이 폭로되었습니다. 검사 출신 변호사가 폭로했고, 경찰 간부들이 축소·은폐했으며, 정권이 조작에 가담했고, 국민들의 분노가 더욱 커졌습니다.

박종철 열사 영정사진
박종철 열사 영정사진 / 출처 : 중도일보

 

4·13 호헌 조치

전두환이 민심을 무시했습니다.

1987 4 13, 호헌 조치(護憲措置)를 발표했습니다.

"현행 헌법으로 정권 이양한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 불가", 간선제를 유지하겠다는 것으로, 민주화 요구를 묵살한 것이었고, 국민들이 분노했습니다. "또 독재냐", "우리를 무시하나", 민주화 열망이 폭발 직전이었습니다.

 

5: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1987 5, 재야·야당·종교계가 연합했습니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를 결성했고, 직선제 개헌을 요구했으며, 전국 조직을 구축했고, 대규모 운동을 준비했습니다.

 

6 9: 이한열 피격

1987 6 9, 연세대에서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학생들이 교문 앞에서, 민주화를 외쳤고, 경찰이 최루탄을 쏘았으며, 연세대생 이한열(李韓烈, 20)이 최루탄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머리에 직격탄을 맞아, 쓰러졌고, 피를 흘리며, 의식을 잃었으며, 동료 학생이 부축하는 사진이 언론에 실렸습니다.

국민들이 충격에 빠졌습니다. "또 학생이 죽어간다", 박종철에 이어 또다시, 젊은이가 희생되고 있었고, 분노가 임계점에 달했습니다.

1987년 6월 9일 경찰이 쏜 최류탄에 뒷머리를 피격당한 고 이한열 열사 사진
1987년 6월 9일 경찰이 쏜 최류탄에 뒷머리를 피격당한 고 이한열 열사 사진 / 출처 : 뉴시스

 

6 10: 6·10 민주항쟁 시작

1987 6 10일 수요일 오후 6, 6·10 민주항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전국 22개 도시에서 동시다발로, 수십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서울 도심이 시위대로 가득 찼으며, 명동·종로·을지로·시청 앞, 어디든 사람들로 넘쳐났고, "호헌 철폐!", "독재 타도!", "직선제 개헌!" 함성이 울렸습니다.

 

특징적인 점:

  • 일반 시민 대거 참여 - 학생뿐 아니라, 넥타이 맨 직장인, 주부, 상인까지
  • 전국 동시다발 - 서울·부산·광주·대전·대구 등
  • 지속적 시위 - 6월 한 달 내내

1987년 6월 10일 넥타이 부태 시위 사진
1987년 6월 10일 넥타이 부태 시위 사진 / 출처 : https://www.koreaherald.com/

 

6월 항쟁의 확산

6 10일 이후 매일 시위가 이어졌습니다.

6 18 - 최루탄 추방 대회로, 전국 33개 도시에서, 150만 명이 참여했고(역대 최대),

6 26 - "국민평화대행진"으로, 전국 37개 도시에서, 180만 명이 참여했으며, 평화 시위를 강조했고, 가족 단위로 참여했으며, "이제는 국민이다"라는 구호로, 정권이 완전히 고립되었습니다.

 

경찰이 진압을 포기했습니다. 최루탄을 수없이 쏘았지만, 사람들이 계속 나왔고, 더 이상 막을 수 없었으며, 미국도 한국 정부에 압박했습니다. "민주화 하라", "폭력 진압 말라", 정권이 궁지에 몰렸습니다.

 

6·29 선언

1987 6 29,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盧泰愚)가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민주정의당 대표 자격으로, 8개 항을 선언했고:

  1. 대통령 직선제 개헌 - 국민의 요구 수용
  2. 대통령 선거법 개정
  3. 김대중 사면 복권
  4. 국민 기본권 신장
  5. 언론 자유
  6. 지방자치제 실시
  7. 정당 활동 보장
  8. 사회 정화

사실상 항복 선언이었습니다.

군부 정권이 국민에게 굴복한 것으로, 직선제를 받아들인 것이었고, 민주화를 약속한 것이었으며, 6월 항쟁이 승리한 것입니다.

6·29 선언 발표하는 노태우
6·29 선언 발표하는 노태우 보도자료 / 출처 : 이세종경제

 

이한열 열사 장례식

1987 7 5, 이한열이 사망했습니다.

6 9일 피격 후, 27일간 혼수상태로, 끝내 깨어나지 못했고,

7 9 국민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연세대에서 시청까지, 100만 명이 운구 행렬을 따랐고, 온 국민이 애도했으며, 민주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한열 열사의 민주 국민장 영결식 / 출처 : Planet03

 

🗳️ 1987년 대선과 민주화 이행

개헌과 대선

1987 10, 국민투표로 헌법 개정을 통과시켰습니다(찬성 93.1%).

대통령 직선제로, 임기 5년 단임제로, 국민이 직접 뽑는 대통령이었고, 12 16, 13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16년 만의 직선제로, 후보는:

  • 노태우(盧泰愚) - 민주정의당, 전두환 후계
  • 김영삼(金泳三) - 통일민주당
  • 김대중(金大中) - 평화민주당
  • 김종필 - 신민주공화당

야권이 분열했습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단일화하지 못했고, 표가 분산되었으며,

결과: 노태우 당선(36.6%), 김영삼 28%, 김대중 27%, 야권 표를 합치면 55% 이상인데, 분열로 패배했고, 아쉬운 결과였습니다.

1987년 13대 대통령 대선 포스터
1987년 13대 대통령 대선 포스터 / 출처 : 인천투데이

노태우 정권 (1988~1993)

1988 2 25,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6공화국).

군부 출신이지만(육사 11, 하나회), 민주적 절차로 선출되었고, 일정한 민주화를 추진했습니다.

여소야대 - 1988 4월 총선에서, 야당이 과반을 차지했고(민정당 패배), 국회가 정부를 견제했으며,

5공 청문회(1988~1989) - 전두환·신군부 비리를 국회에서 조사했고, TV로 생중계되었으며, 국민들이 지켜봤고, 전두환이 청문회에 출석해, "역사의 심판을 받겠다" 발언했으며, 하지만 처벌은 미약했습니다.

1995에야 전두환·노태우가 법정에 섰고, 12·12, 5·18 책임으로 재판받았으며, 전두환 무기징역, 노태우 징역 17년 선고되었지만, 1997특별사면으로 풀려났습니다(김영삼 대통령이 사면). 완전한 청산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논란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1987년 체제

1987년 민주화는 한국 현대사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87년 체제 또는 87년 헌법으로:

  • 대통령 직선제
  • 5년 단임제
  • 국회의 견제
  • 언론의 자유
  • 집회·결사의 자유

민주주의가 제도화되었고, 이후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으며:

  • 1993: 김영삼(문민 정부)
  • 1998: 김대중(국민의 정부, 최초 여야 정권 교체)
  • 2003: 노무현(참여 정부)
  • 2008: 이명박(보수 정권 복귀)
  • 등등

💭 에필로그: 피로 쓴 민주주의

8년의 투쟁 (1979~1987)

1979 10·26 이후 1987년까지 8년은, 군부 독재와 민주화 투쟁의 시기였습니다. 신군부가 12·12로 권력을 잡았고, 5·18 광주를 학살했으며, 7년간 독재를 했지만, 국민들이 끝까지 저항했고, 박종철·이한열의 죽음으로, 6월 항쟁이 폭발했으며, 마침내 민주화를 쟁취했습니다.

 

희생자들

민주화는 공짜가 아니었습니다.

5·18 희생자 - 165명 이상 사망(공식),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되며,

1980년대 민주화 운동 - 수많은 학생·노동자·시민이, 구속·고문·죽음을 당했고,

박종철·이한열 - 20대 젊은이들이, 목숨을 바쳤으며, 그들의 희생 위에 민주주의가 있습니다.

 

5·18 재평가

5·18은 오랫동안 왜곡되었습니다.

"폭도", "북한 개입"이라는 거짓 선전이 있었지만, 진실이 밝혀졌습니다.

1988 국회 청문회에서 재조명되었고,

1995 5·18 특별법 제정으로,

1997 전두환·노태우 유죄 판결로(대법원), 국가기념일이 되었으며(1997),

2011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되었고,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았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5·18을 왜곡하는 세력이 있고, "북한군 개입설" 등 음모론이 나돌며, 진실 왜곡과 싸우고 있습니다.

국립 5.18민주 묘지
국립 5.18민주 묘지 / 출처 :나무위키

 

6월 항쟁의 의미

1987 6월 항쟁은 평화적 시민 혁명이었습니다.

시민들의 힘으로 독재를 무너뜨렸고, 학생만이 아니라 전 국민이, 직선제를 쟁취했으며,

민주주의 공고화 - 이후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고, 민주주의가 발전했으며,

한계 - 야권 분열로 노태우 당선되어, 완전한 청산은 못 했지만, 민주화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현재에 이어지는 과제

1987년 이후 3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과제가 있습니다.

과거사 청산 - 5·18 진상 규명 계속되고, 군부 독재 청산이 완전하지 않으며,

민주주의 심화 - 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질적 민주주의로,

사회 정의 - 빈부 격차, 불평등 해소해야 하며,

5·18 정신 계승 -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민주주의를 지켜야 합니다.

 

1979~1987 8년은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고, 피를 흘렸으며, 그 위에 지금의 민주주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기억해야 하고, 민주주의를 지켜야 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1990년대 이후 현대사, 문민정부와 민주주의 발전을 다루겠습니다!

 

🎯 핵심 정리

시기별 흐름

1979.10.26 - 박정희 서거

1979.12.12 - 12·12 사태 (신군부 쿠데타)

1980년 봄 - 서울의 봄

1980.5.17 - 비상계엄 전국 확대

1980.5.18~27 - 5·18 광주민주화운동

1980.8 - 전두환 집권

1981 - 5공화국 출범

1987.1.14 - 박종철 고문치사

1987.4.13 - 4·13 호헌 조치

1987.6.9 - 이한열 피격

1987.6.10~29 - 6월 민주항쟁

1987.6.29 - 6·29 민주화 선언

1987.12.16 - 직선제 대통령 선거

1988.2 - 노태우 정권

 

12·12 사태 (1979)

날짜: 1979 12 12

주도: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

내용:

  • 정승화 계엄사령관 체포
  • 무력 충돌
  • 군권 장악

성격: 군사 반란

결과: 신군부 집권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간: 1980 5 18~27

배경: 5·17 비상계엄 확대

경과:

  • 5.18: 학생 시위, 계엄군 과잉 진압
  • 5.21: 집단 발포
  • 5.22~26: 시민군 저항, 해방 광주
  • 5.27: 도청 최후 항전

희생:

  • 사망 165+ (공식)
  • 부상 3,139
  • 행불 76

의의:

  • 국가 폭력에 저항
  • 절대 공동체
  • 민주화의 씨앗

전두환 정권 (1980~1988)

집권: 1980 8 (군사)

정식: 1981 3 (5공화국)

특징:

  • 5공화국
  • 3S 정책
  • 언론 통제
  • 삼청교육대
  • 88 올림픽 유치

부정:

  • 5·18 주범
  • 독재
  • 부정부패

1987년 민주화 과정

1 14: 박종철 고문치사

  • 서울대생 (21)
  • 물고문으로 사망
  • "! !" 발표
  • 진실 폭로로 국민 분노

4 13: 호헌 조치

  • 간선제 고수
  • 직선제 거부
  • 국민 반발

6 9: 이한열 피격

  • 연세대생 (20)
  • 최루탄 직격
  • 7 5일 사망

6 10: 6·10 민주항쟁 시작

  • 전국 동시다발
  • 일반 시민 참여
  • 매일 시위

6 29: 6·29 선언

  • 노태우 발표
  • 직선제 수용
  • 민주화 약속

6월 민주항쟁

기간: 1987 6 10~29

규모:

  • 6.10: 수십만 명
  • 6.18: 150만 명 (33개 도시)
  • 6.26: 180만 명 (37개 도시)

특징:

  • 평화 시위
  • 시민 대거 참여
  • 넥타이 부대
  • 전국적 연대

결과:

  • 6·29 선언
  • 직선제 쟁취
  • 민주화 이행

1987년 대선

날짜: 1987 12 16특징: 16년 만의 직선제

후보:

  • 노태우 (36.6%) - 당선
  • 김영삼 (28.0%)
  • 김대중 (27.0%)
  • 김종필 (8.1%)

결과:

  • 야권 분열로 노태우 당선
  • 아쉬운 승리

주요 인물

이름 역할 운명
전두환 5공 대통령 1995년 재판, 사면
노태우 6공 대통령 1995년 재판, 사면
김대중 야당 지도자 1998년 대통령
김영삼 야당 지도자 1993년 대통령
박종철 열사 1987년 고문치사
이한열 열사 1987년 최루탄 피격

 

민주화 희생자

5·18 광주:

  • 165+ 사망
  • 수천 명 부상

1980년대:

  • 박종철 (21)
  • 이한열 (20)
  • 수많은 학생·노동자

87년 헌법

주요 내용:

  • 대통령 직선제
  • 임기 5년 단임제
  • 국회 견제 강화
  • 언론·집회의 자유
  • 기본권 보장

의의:

  • 민주주의 제도화
  • 정권 교체 가능
  • 현행 헌법 기반

민주화 이후 정권

1988~1993: 노태우 (6공화국)

1993~1998: 김영삼 (문민 정부)

1998~2003: 김대중 (국민의 정부)

2003~2008: 노무현 (참여 정부) ...계속

 

5·18 재평가

1988: 국회 청문회 1995: 5·18 특별법 1997:

  • 전두환·노태우 유죄
  • 국가기념일 지정

2011: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역사적 의의

5·18:

  • 국가 폭력 저항
  • 민주화 씨앗
  • 세계적 민주화 운동

6월 항쟁:

  • 평화적 시민 혁명
  • 직선제 쟁취
  • 민주주의 전환

87년 체제:

  • 민주주의 제도화
  • 정권 교체 시작
  • 현재까지 영향

📚 참고 자료 및 더 알아보기

방문할 수 있는 곳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 - 광주 동구

5·18 민주묘지 -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 - 광주 북구

민주화운동기념관 - 서울 종로구

박종철기념관 - 서울 종로구

이한열기념관 - 경기 인천

전두환 생가 (현재는 철거)

민주공원 - 부산 중구

 

추천 도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광주 다이어리』 / 1987 / 『님을 위한 행진곡』 / 『박종철 평전』

 

영화

영화 『택시운전사』(2017) / 송강호 / 5·18 배경

영화 1987(2017) / 김윤석 / 박종철·6월 항쟁

영화 26년』(2012) / 5·18 복수

영화 『화려한 휴가』(2007) / 김지훈 / 5·18

영화 『변호인』(2013) / 송강호 / 부림사건

영화 『서울의 봄』(2023) / 황정민 / 12·12 사태

 

다큐멘터리

KBS 5·18은 말한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노래

『님을 위한 행진곡』 - 5·18 상징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광주여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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