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40년대 독립투쟁과 광복] 한인애국단에서 광복까지, 마지막 15년

2025. 12. 2. 11:00역사 Detox_한국사를 알아보자/🏛️ 근대: 개항기부터 일제 강점기

프롤로그: 1945 8 15, 광복의 순간

1945(소화 20) 8 15일 정오, 라디오에서 일본 천황 히로히토(裕仁)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잡음이 심한 녹음 방송으로, "짐은... 연합국의 공동선언을 수락하기로 했다(朕は... ポツダム宣言を受諾することにした)", 일본어 특유의 완곡한 표현이었지만, 의미는 명확했습니다. 일본이 항복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선 땅에서 방송을 듣던 사람들이 순간 얼어붙었습니다.

"뭐라고?", "일본이 항복했다고?", "우리가... 해방되었다고?" 믿을 수 없었습니다.

35년간(1910~1945) 식민 지배를 받았고, 끝이 없을 것 같았는데, 갑자기 해방이라니, 꿈만 같았습니다.

잠시 후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대한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함성이 터져 나왔고, 서로 껴안고 울었으며, 웃고 울고 춤추고, 35년 만의 자유였고, 억눌렸던 감정이 폭발했으며, 태극기가 곳곳에서 펄럭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혼란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은 물러갔지만, 소련군이 북쪽으로 들어왔고(8 9일부터), 미군이 남쪽으로 들어왔으며(9 8), 38선이 그어졌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지만, 동시에 분단의 비극도 시작되었습니다.

"어떻게 광복을 맞이했는가?",

1930 ~ 1945, 독립운동의 마지막 장과 해방의 순간을 들려드리겠습니다.

1945년 9월 9일 시민들이 손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들고 광복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시민들이 손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들고 광복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 1930년대 초반: 한인애국단의 의거

1931년 만주사변

1931 9 18, 일본이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켰습니다.

중국 만주(동북) 지역을 침략했고, 류타오후(柳條湖) 사건을 조작해(자작극), 만주 전역을 점령했으며(1931~1932),

1932 3 괴뢰국 만주국(滿洲國)을 세웠습니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허수아비로, "왕도낙토(王道樂土)"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식민지였고, 관동군이 지배했습니다.

일본의 침략 야욕이 본격화되었고, 조선인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으며, "일본을 막아야 한다", 무장투쟁과 의열투쟁이 강화되었습니다.

 

한인애국단 결성

1931 10, 상하이(上海)에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이 조직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조직으로, 김구(金九, 1876~1949)가 단장이었고, 의열투쟁 전담 조직으로,

"일본 요인을 제거한다", "조선 독립을 세계에 알린다" 목표를 세웠고, 젊은 청년들이 모였습니다.

 

김구는 누구인가요?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어린 시절 가난했고, 동학에 참여했다가(1894), 명성황후 시해 후 일본인을 죽이고 투옥되었으며(1896, 탈옥), 교육 사업을 하다가, 3·1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했고(1919), 임시정부 요인이 되었으며, 1926년부터 임시정부를 이끌었고,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했습니다.

김구 선생님
김구 선생님 / 출처 : 위키백과

 

1932 1 8: 이봉창 의거

이봉창(李奉昌, 1901~1932)이 첫 번째 의거를 단행했습니다.

서울 용산 출신으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자로 일했고, 일본의 차별에 분노했으며, 1931년 상하이로 가서 김구를 만났고, 한인애국단에 가입했으며, "일왕을 죽이겠습니다" 자원했습니다.

 

1932 1 8, 도쿄(東京)에서 의거를 실행했습니다.

히로히토 천황이 관병식(觀兵式) 참관 후, 마차로 돌아오는 길에, 이봉창이 수류탄을 던졌지만, 빗나가 실패했고, 마차 옆 호위 마차를 폭파했으며, 천황은 무사했습니다.

이봉창이 즉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나는 독립운동가다", "조선 독립을 위해 싸웠다" 당당했으며,

1932 10 10 사형 집행되었습니다(31).

비록 천황 암살은 실패했지만, 세계적 뉴스가 되었고,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보여줬으며, 일본을 충격에 빠뜨렸고, 독립운동에 새 활력을 주었습니다.

이봉창 의사 사진
이봉창 의사 사진 / 출처 : 시사주간

 

1932 4 29: 윤봉길 의거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이 두 번째 의거를 단행했습니다.

충남 예산 출신으로, 농촌 계몽운동을 하다가, 1930년 중국으로 망명했고, 상하이에서 김구를 만났으며, 한인애국단에 가입했고, "몸을 바쳐 조국에 보답하겠습니다" 서약했습니다.

1932 4 29, 상하이 훙커우(虹口) 공원에서 의거를 실행했습니다.

일본 천장절(天長節, 천황 생일) 기념식 거행 중, 일본군 전승 축하 행사였고(만주 점령), 일본 고관들이 모였으며, 단상에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등이 앉았고, 윤봉길이 도시락 폭탄을 던졌습니다. 폭탄을 도시락과 물통에 숨겨, 단상으로 던졌고, 대폭발이 일어났습니다.

 

결과:

  • 시라카와 사령관: 중상 후 사망
  •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공사): 다리 절단
  •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제독): 실명
  •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 중상
  • 등 여러 명 사상

일본이 대패닉에 빠졌고, 윤봉길이 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으로 압송되었으며(가나자와 육군 형무소),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받았고, 1932 12 19 총살형으로 순국했습니다(25).

홍커우 공원 의거
홍커우 공원 의거 / 출처 : Humanities.Map

윤봉길 의거의 영향

윤봉길 의거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국제적 주목 - 세계 언론이 대서특필했고, "조선인이 일본에 저항하고 있다", 독립운동이 세계에 알려졌으며,

중국의 인식 변화 - 중국 국민당 장제스(蔣介石)가 감동했고, "조선인 한 명이 중국군 100만 명보다 낫다" 평가했으며,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기 시작했고,

임시정부 활력 - 침체되었던 임시정부가 되살아났고, 재정 지원이 늘어났으며,

일본의 경악 - 일본이 경호를 대폭 강화했고, 독립운동 탄압을 더 강화했습니다.

 

김구가 남긴 말: "이봉창과 윤봉길 두 청년의 의거로 임시정부가 다시 살아났다"

 

⚔️ 1930년대: 만주 무장투쟁

조선혁명군

양세봉(梁世奉, 1896~1934)조선혁명군을 이끌었습니다.

평북 의주 출신으로, 1920년대부터 독립군 활동을 했고, 1929년 조선혁명군 총사령이 되었으며, 수천 명 규모였고, 만주 지린성(吉林省) 일대에서 활동했습니다.

 

1932~1933년 영릉가·흥경성 전투 - 일본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고, 유격전으로 일본군을 괴롭혔으며, 중국 의용군과 연합 작전도 펼쳤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토벌이 강화되었고, 1934년 양세봉이 친일파에게 암살당했으며(38), 조선혁명군이 약화되었습니다.

양세봉 장군 사진
양세봉 장군 사진 / 출처 : 위키백과

 

지청천(池靑天, 1888~1957)한국독립군을 이끌었습니다.

서울 출신으로,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지냈고, 1930년대 한국독립군 총사령이 되었으며, 수천 명 규모였고, 만주 남부에서 활동했습니다.

 

1933 6~7월 대전자령·동경성 전투 - 일본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였고, 쌍성보(雙城堡) 전투 등에서 승리했으며, 일본군 수백 명을 사살했고, 독립군 최후의 큰 승리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고, 만주국 괴뢰군도 동원되어, 1930년대 중반 이후 독립군 활동이 어려워졌으며, 많은 독립군이 중국 관내로 이동했습니다.

 

동북항일연군과 조선인

중국 공산당이 만주에서 항일 유격대를 조직했고,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이 결성되었으며(1936), 많은 조선인이 참여했습니다.

김일성(金日成, 1912~1994) - 본명 김성주로, 1930년대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했고, 소규모 부대를 이끌었으며, 1937년 보천보 전투로 이름을 알렸고(함경남도 국경 마을 습격), 1940년대 초 소련으로 이동했으며, 해방 후 북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홍광(李紅光), 최현(崔賢) 등 많은 조선인 지휘관들이 있었고, 수만 명의 조선인이 참여했으며, 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웠고, 많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 1930년대 후반: 민족말살통치

1937년 중일전쟁

1937 7 7, 일본이 중국 본토를 침략했습니다.

중일전쟁(中日戰爭) 또는 중국항일전쟁이 시작되었고, 베이징 근처 루거우차오(盧溝橋) 사건이 발단이었으며, 일본군이 중국 대륙 깊숙이 진입했고, 난징(南京) 대학살 등 잔학행위를 저질렀으며, 중국이 전면 항전에 나섰습니다.

일본이 전쟁 물자가 필요해졌고, 조선을 병참기지로 만들었으며, 수탈과 억압이 극심해졌고, 민족말살정책이 본격화되었습니다.

 

황국신민화 정책

일본이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만들려" 했습니다.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 암송 강요 - "나는 대일본제국 신민입니다", 매일 아침 학교·직장에서 암송했고,

궁성요배(宮城遙拜) - 일본 왕궁 방향으로 절하게 했고,

신사참배 강요 - 신사(神社)에 참배하게 했고, 기독교회도 강요받았으며, 거부하면 탄압받았습니다.

신사참배 강요 사진
조선 총독부의 강요에 의해 단체로 참여하여 신사에 절하고 있는 학생들

 

1938년 국가총동원법

1938, 일본이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했습니다.

전시 체제로 전환했고, 모든 인력·물자를 전쟁에 동원했으며, 조선에도 적용되었고,

지원병제(1938) - 조선인 청년을 "자원"이라는 이름으로 징집했고, 실제로는 강제였으며,

학병제(1943) - 대학생까지 징집했고, 수만 명이 끌려갔으며,

징병제(1944) - 전면 징병을 실시했고, 20만 명 이상이 징집되었습니다.

 

많은 조선 청년이 일본군으로 끌려가, 태평양 전쟁터로 보내졌고, 중국·동남아·태평양 섬들에서, 수만 명이 죽었고, 일부는 탈출해 독립군에 합류하기도 했습니다.

 

1939년 창씨개명

1939 11, 일본이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했습니다.

조선식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라는 것으로, 처음에는 "자발적"이라 했지만, 실제로는 강요였고, 바꾸지 않으면 불이익을 줬으며(학교·직장), 1940년까지 80% 이상이 바꿨고, 민족정체성을 말살하려 한 것이었습니다.

예시:

  • 김구 가네쿠니 이사오(金九勇)로 강요당했지만 거부
  • 많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바꿈
  • 해방 후 다시 되돌림

한글 사용 금지 - 학교에서 한글 교육 금지했고, 한글 신문·잡지 폐간했으며(1940), 조선어학회를 탄압했고(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일본어만 쓰게 강요했습니다.

내선일체 포스터 / 출처 : 나무위키

강제 동원

근로정신대·여자정신대 - 10~20대 여성을 공장에 동원했고, "일하러 간다"며 속였지만, 일부는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고, 성노예로 만들어졌으며, 수십만 명이 피해를 입었고,

강제 노동 - 탄광·공장·건설 현장에 동원했고, 수십만 명이 끌려가,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으며, 많은 사람이 죽었고,

식량·물자 수탈 - ·금속·목화 등 모든 것을 빼앗았고, 조선인은 굶주렸으며, 금속 공출로 숟가락·그릇까지 빼앗겼습니다.

 

1930년대 후반~1945년은 가장 암흑한 시기였습니다.

민족이 말살될 위기에 처했고, 하지만 독립운동은 멈추지 않았으며,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 1940년대: 광복을 향한 마지막 투쟁

1940년 한국광복군 창설

1940 9 17, 중국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이 창설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 총사령관 지청천, 참모장 이범석(李範奭) 등이 지휘했고, 수백 명으로 시작해 점차 늘어났으며, 중국 각지에 흩어진 독립군을 통합했고, 중국군과 연합 작전을 펼쳤습니다.

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 기념사진
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 기념사진 / 출처 : 나무위키

활동:

  • 중국 전선에서 일본군과 교전
  • 인도·미얀마 전선 파견 (영국군과 협력)
  • 정보 수집·선전 활동
  • 일본군 포로 심문·전향 공작
  • 국내 진공 작전 준비 (실행 전 해방)

한국광복군은 해방 직전까지 활동했고, 1945 8월 국내 진입을 준비했지만, 일본이 먼저 항복해, 실전 투입은 제한적이었지만, 상징적 의미가 컸고, "우리도 연합국으로 싸웠다", 대한민국 군대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조선의용대와 조선의용군

1938, 중국 우한(武漢)에서 조선의용대가 조직되었습니다.

김원봉이 창설했고, 중국 국민당 지원을 받았으며, 수백 명 규모로 시작했고, 중국군과 함께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하지만 내부 분열이 일어났고, 1942년 일부가 중국 공산당 쪽으로 가, 조선의용군이 되었으며, 화북(華北) 지역에서 활동했고, 해방 후 일부는 북한으로, 일부는 중공군에 남았습니다.

 

1941 12: 태평양전쟁

1941 12 7(미국 시각), 일본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습니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고, 일본 vs 미국·영국·중국·네덜란드 등 연합국이 전면전을 벌였으며, 전쟁이 조선반도까지 확대될 가능성이 생겼고, 독립운동가들에게는 기회였습니다. "일본이 질 것이다", "곧 해방될 것이다", 희망을 가졌습니다.

1941 12 10,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일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우리도 연합국이다", "일본과 싸우고 있다", 국제적 지위를 주장했고, 한국광복군을 연합군의 일원으로 인정받으려 했습니다.

 

1943년 카이로 선언

1943 11, 미국·영국·중국 정상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회담했습니다.

카이로 선언을 발표했고, 전후 처리 방침을 논의했으며, "한국(Korea)의 독립"을 명시했습니다.

"적절한 시기에(in due course) 한국을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로 만들 것", 조건부이긴 했지만, 처음으로 열강이 한국 독립을 약속했고, 독립운동가들이 고무되었으며, 하지만 "적절한 시기"가 언제인지 불명확했고, 신탁통치 논란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1945년 초반: 전쟁 막바지

1944~1945, 일본이 패전 직전이었습니다.

태평양에서 연합군에 밀렸고, 섬들이 하나씩 함락되었으며, 1945년 초 필리핀·오키나와 상실했고, 미군이 일본 본토로 접근했으며, 일본 본토가 공습당했고(도쿄 대공습 등), 독일이 항복했습니다(1945 5 8). 일본이 고립되었고, 조선에서도 긴장이 고조되었으며, "곧 전쟁이 끝날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이 국내 진입을 준비했습니다.

 

🕊️ 1945 8: 광복의 순간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1945 8 6, 미국이 히로시마(廣島)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습니다.

순식간에 10만 명 이상 사망했고, 도시가 초토화되었으며, 8 9, 나가사키(長崎)에 두 번째 원폭을 투하했고, 수만 명이 또 사망했으며, 일본이 패망 직전이었습니다. 원폭 피해자 중 많은 조선인이 있었습니다. 강제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갔던 사람들로, 히로시마·나가사키에서 일하다가, 원폭 피해를 입었고, 수만 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해방 후에도 고통받았습니다.

일본 나가사키에 터진 원자폭탄
일본 나가사키에 터진 원자폭탄 / 출처 : pixabay

소련 참전

1945 8 9 새벽,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했습니다.

중립을 지키던 소련이 전쟁에 참전한 것으로, 만주와 한반도 북부로 진격했으며, 소련군 150만 명이 압록강을 넘었고, 일본 관동군이 무너졌으며, 북한 지역을 빠르게 점령했고(8월 중순), 함흥·평양까지 진출했습니다.

 

8 15: 일본 항복

1945 8 15일 정오, 일본 천황이 항복 방송을 했습니다(옥음방송).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했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났으며, 조선이 해방되었습니다.

 

조선 땅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졌습니다. 35년 만의 독립이었고,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으며,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 외쳤고, 서로 껴안고 울었으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감옥의 독립운동가들이 풀려났고, 친일파들은 숨어들었으며, 일본인들은 황급히 짐을 싸기 시작했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광복 후의 모습
광복 후의 모습 / 출처 : 나무위키

🤝 해방 직후: 혼란과 분단의 씨앗

건국준비위원회

일본이 항복하자, 조선인들이 스스로 정부를 만들려 했습니다.

8 15,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가 조직되었습니다.

여운형(呂運亨)이 위원장이 되었고, 좌우익이 연합했으며, 전국에 지부를 설치했고, 치안·행정을 담당했으며, 사실상의 임시 정부였습니다.

9 6,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이승만을 주석으로 추대하고(본인 동의 없이), 여운형이 부주석이 되었으며, 하지만 곧 문제가 생겼습니다.

 

미군·소련군 진주

9 2, 일본이 공식 항복 문서에 서명했습니다(도쿄만 미주리함).

9 8,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습니다. 24군단 사령관 하지(John Hodge) 중장이 지휘했고, 38선 이남을 점령했으며, 미군정(美軍政)을 선포했고(9 9), 조선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건국준비위원회를 해산시켰고, 일본 총독부 관리를 다시 기용했으며,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소련군은 이미 8월 중순부터 북한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38선 이북을 장악했고, 소련군정을 실시했으며, 김일성 등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했고, 북한 정권 수립을 준비했습니다.

38선과 휴전선 비교 / 출처 : 천지일보

 

38선 분단

38(38도선)이 한반도를 가로질렀습니다.

미국과 소련이 편의상 그은 선으로, 일본군 무장 해제를 위한 임시 경계였는데, 점차 고착화되어갔고, 남북 왕래가 차단되었으며, 분단의 시작이었습니다. 조선인들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왜 우리 땅을 나누는가?", 하지만 강대국의 결정이었고, 냉전(Cold War)이 시작되고 있었으며, 미국 vs 소련 대립이 한반도에도 반영되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의 귀국

해외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속속 귀국했습니다.

11 23, 김구가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했습니다. 27년 만의 귀국으로, 환영 인파가 몰려들었고, 하지만 "개인 자격"으로만 입국 허가되었으며(미군정이 임시정부를 인정 안 함), 김구가 실망했습니다.

12, 김규식, 이시영 등도 귀국했고, 만주·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도 돌아왔으며, 하지만 정치적 혼란이 심화되었고, 좌익 vs 우익 대립이 격화되었으며, 친일파가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었고, 독립운동가들이 분노했습니다.

김구 귀국 환영 인파
김구 귀국 환영 인파 / 출처 : 월간중앙

신탁통치 파동

1945 12,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가 열렸습니다(··).

한반도 문제를 논의했고, 신탁통치(信託統治) 결정을 발표했습니다.

"최장 5년간 4개국(···) 신탁통치", 한국인의 자치 능력을 키운 후 독립, 조선인들이 격분했습니다.

"우리가 왜 신탁통치를 받아야 하나?", "즉각 독립을 달라!", 전국에서 반탁(反託) 시위가 일어났고, 하지만 좌우익이 다르게 반응했습니다.

우익 - 반탁, "신탁통치 절대 반대", 김구·이승만 등이 주도했고,

좌익 - 처음 반탁했다가, 찬탁으로 전환했고(소련의 지시), "신탁통치를 거쳐 독립", 결과적으로 좌우 대립이 격화되었고, 통일 정부 수립이 어려워졌으며, 분단으로 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 에필로그: 광복과 분단

광복의 의미

1945 8 15 광복절(光復節)이 되었습니다.

"빛을 되찾은 날"이라는 뜻으로, 35년 식민 지배에서 해방되었고, 독립을 되찾았으며, 대한민국 국경일이 되었습니다.

광복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연합국 승리 - 미국·소련·중국 등이 일본을 패배시켰고,

독립운동의 노력 - 35년간 끊임없이 싸웠고, 국내외에서 저항했으며,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보여줬고,

우연과 필연 - 원폭, 소련 참전 등 우연적 요소도 있었지만, 일본의 패배는 필연이었고, 조선의 해방도 필연이었습니다.

 

아쉬움과 과제

하지만 완전한 광복은 아니었습니다.

자력 해방이 아니었다 - 우리 힘으로 독립을 쟁취한 것이 아니었고, 연합국 덕분에 해방되었으며, 주도권을 잃었고,

분단의 시작 - 38선이 그어졌고, 남북이 갈라지기 시작했으며,

친일파 청산 실패 - 친일파가 처벌받지 않았고, 오히려 권력을 유지했으며,

정치적 혼란 - 좌우 대립이 극심했고, 통일 정부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독립운동의 유산

35년간의 독립운동이 남긴 것은 무엇일까요?

대한민국의 정통성 - 임시정부-광복군의 전통을 계승했고, 헌법에 명시되어 있으며,

민주주의 정신 - 민주공화국을 지향했고, 국민주권 사상을 확립했으며,

저항 정신 -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의지로, 후대에 영감을 주었고,

희생과 헌신 - 수만 명이 목숨을 바쳤고, 그들의 희생을 기억해야 하며,

자주독립 정신 -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려는 의지입니다.

 

1945 8 15일은 끝이자 시작이었습니다.

식민 지배가 끝났지만,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고, 3년 후(1948) 남한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고, 분단이 고착화되었으며,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고, 70년 넘게 분단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광복의 기쁨과 독립운동의 정신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35년간 독립을 위해 싸운 분들, 이름 없이 사라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한국전쟁을 다루겠습니다!

 

🎯 핵심 정리

1930~1945년 타임라인

연도 시기 사건 구분 세부 내용
1931 년 9월 만주사변 일제침략 일제의 대륙 침략 본격화
1931 년 10월 한인애국단 결성 독립운동 김구 주도, 상하이에서 결성
1932 년 1월 8일 이봉창 의거 독립운동 도쿄에서 일왕 폭살 시도 (한인애국단)
1932 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 독립운동 상하이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한인애국단)
1932 년 1932~34년 조선혁명군 활동 독립운동 남만주 일대 항일 무장 투쟁 (양세봉)
1937 년 7월 중일전쟁 발발 일제침략 일본의 중국 본토 침략 시작
1938 년 - 조선의용대 창설 독립운동 김원봉 주도, 중국 관내 최초 한인 무장부대
1939 년 - 창씨개명 강요 일제침략 민족 말살 통치, 황국신민화 정책 강화
1940 년 9월 한국광복군 창설 독립운동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정규군 창설
1941 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 국제 정세 일본의 진주만 기습, 제2차 세계대전 확전
1941 년 12월 대일 선전포고 독립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일본에 전쟁 선포
1943 년 11월 카이로 선언 국제 정세 미·영·중 정상회담, 한국 독립 최초 약속
1945 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국제 정세 미국,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투하
1945 년 8월 9일 나가사키 원폭 / 소련 참전 국제 정세 나가사키 원폭 투하 및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
1945 년 8월 15일 광복(8.15) 역사적 사건 일제 무조건 항복, 조국 해방
1945 년 9월 8일 미군 진주 해방 정국 미군, 38선 이남 진주 및 군정 실시
1945 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해방 정국 신탁통치 결정, 좌우익 대립 심화

 

한인애국단 의거

이봉창 의거 (1932.1.8)

  • 대상: 히로히토 천황
  • 장소: 도쿄
  • 결과: 실패, 이봉창 순국 (31)

윤봉길 의거 (1932.4.29)

  • 대상: 일본군 수뇌부
  • 장소: 상하이 훙커우 공원
  • 결과: 시라카와 사령관 등 사망, 윤봉길 순국 (25)
  • 영향: 세계적 주목, 임시정부 활력

만주 무장투쟁

조선혁명군 (양세봉)

  • 1932~1933년 영릉가·흥경성 전투
  • 1934년 양세봉 암살

한국독립군 (지청천)

  • 1933년 대전자령·동경성 전투
  • 쌍성보 전투 승리

동북항일연군

  • 중국 공산당 항일 부대
  • 조선인 다수 참여
  • 김일성 등 활동

민족말살통치 (1937~1945)

황국신민화:

  • 황국신민서사 암송
  • 궁성요배
  • 신사참배 강요

창씨개명 (1939):

  • 일본식 이름 강요
  • 80% 이상 개명

한글·역사 말살:

  • 한글 사용 금지
  • 조선어학회 탄압
  • 한글 신문 폐간

강제 동원:

  • 징용·징병 (20+ )
  • 일본군 위안부
  • 강제 노동

한국광복군 (1940)

창설: 1940 9 17 (충칭)

지휘관: 지청천(총사령), 이범석(참모장)

성격: 임시정부 정규군

활동:

  • 중국 전선 참전
  • 인도·미얀마 파견
  • 정보·선전 활동
  • 국내 진공 준비 (미실행)

태평양전쟁 (1941~1945)

1941.12.7: 진주만 공격

1941.12.10: 임시정부 대일 선전포고

1943.11: 카이로 선언

1945.5: 독일 항복

1945.8.6: 히로시마 원폭

1945.8.9: 나가사키 원폭, 소련 참전

1945.8.15: 일본 항복

 

광복 (1945.8.15)

일본 항복: 포츠담 선언 수락

조선 해방: 35년 식민 지배 종식

환희:

  • 전국에서 만세 운동
  • 독립운동가 석방
  • 태극기 게양

혼란:

  • 건국준비위원회 조직
  • 미군·소련군 진주
  • 38선 분단
  • 신탁통치 파동

해방 직후 (1945.8~12)

8 15: 건국준비위원회 (여운형)

9 6: 조선인민공화국 선포

9 8: 미군 인천 상륙

9 9: 미군정 선포

11 23: 김구 귀국

12: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

 

주요 인물

이름 역할 업적
김구 임시정부, 한인애국단 평생 독립운동
이봉창 한인애국단 천황 저격 시도
윤봉길 한인애국단 훙커우 공원 의거
양세봉 조선혁명군 만주 무장투쟁
지청천 한국독립군, 광복군 총사령관
김원봉 의열단, 조선의용대 무장투쟁
여운형 건국준비위원회 해방 정국 주도

 

광복의 의미

성취:

  • 35년 식민 지배 종식
  • 독립 회복
  • 자유 획득

한계:

  • 자력 해방 아님
  • 38선 분단
  • 친일파 청산 실패
  • 정치 혼란

유산:

  • 대한민국 정통성
  • 민주공화국 지향
  • 저항 정신
  • 자주독립 의지

📚 참고 자료 및 더 알아보기

방문할 수 있는 곳

독립기념관 - 충남 천안 | 종합 전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 서울

백범김구기념관 - 서울 용산

윤봉길 의사 기념관 - 충남 예산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 서울 서대문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 서울(건립 중)

한국광복군 기념관 - 충칭(중국)

전쟁기념관 - 서울 용산 | 광복군 전시

 

추천 도서

『백범일지』(김구) / 『윤봉길 평전』 / 『한국광복군』 / 『한국독립운동사』 / 『나의 투쟁』(김원봉 관련)

 

영화/드라마

영화 『암살』(2015) / 전지현, 이정재 / 1930년대 독립운동

영화 『밀정』(2016) / 송강호, 공유 / 의열단

영화 『봉오동 전투』(2019) / 유해진 / 1920년 전투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2019) / 고아성

영화 『귀향』(2016) / 위안부 문제

드라마 『비밀의 문』, 『미스터 션샤인』

 

광복절

매년 8 15: 대한민국 국경일

기념 행사: 전국 각지

의미: 독립 회복, 자유 획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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