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무 vs 유득공 : 조선의 실학자들은 무엇을 기록하려 했을까

2026. 6. 2. 10:32역사 Detox_한국사를 알아보자

이덕무 유득공 비교 조선 실학 역사 썸네일

 

조선 후기, 변화의 바람이 불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에 걸친 조선은 겉으로 보기엔 평온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번의 큰 전쟁을 겪으며 나라의 기반이 흔들렸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습니다.

그동안 절대적인 권위를 자랑하던 성리학은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인(仁)을 실천하라", "예(禮)를 따르라"는 말은 아름다웠지만, 굶주린 백성의 배를 채워주지는 못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일부 학자들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공허한 이론보다, 실제로 쓸 수 있는 학문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것이 바로 실학(實學)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실학은 '실제로 도움이 되는 학문'이라는 뜻으로, 농업·상업·기술·역사·지리 등 현실에 밀착된 분야를 적극적으로 연구하는 학풍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실학의 흐름 안에서,

특히 북쪽에서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 북학파(北學派) 안에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명은 평생 책을 읽고 지식을 정리한 이덕무(李德懋), 또 한 명은 사라진 나라의 역사를 끝내 복원해 낸 유득공(柳得恭)입니다.

오늘은 이 두 학자의 삶과 학문, 그리고 그들이 기록을 통해 후대에 남긴 것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이덕무 : 책 속에서 세상을 찾은 학자

이덕무 청장관전서 북학파 학자 설명 이미지

서얼, 두 세계 사이에 서다

이덕무는 1741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의 출생에는 큰 그늘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서얼(庶孼) 출신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조선 시대에 서얼이란, 양반 아버지와 첩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를 말합니다. 양반의 피를 이어받았지만, 법적으로는 관직에 나아가는 데 심한 제한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아무리 뛰어난 글을 써도 그 능력을 세상에 펼칠 수 있는 길이 막혀 있었던 것입니다.

이덕무에게 세상은 불공평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평 대신 책을 선택했습니다.

간서치(看書癡), 책을 사랑한 바보

이덕무는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癡)', 즉 책 읽는 바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자조가 아니라, 오히려 자부심에 가까운 표현이었습니다.

그는 정말로 엄청난 독서광이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도 책을 읽었고, 날이 추워도 책을 읽었습니다.

집이 가난해서 남의 책을 빌려 읽어야 할 때도, 밤새 베껴 쓰며 자신만의 지식을 쌓아갔습니다. 그에게 책은 단순한 지식의 도구가 아니라, 세상과 소통하는 창이었습니다.

조선과 중국의 고전, 역사서, 문학, 천문, 지리, 풍속에 이르기까지 그가 읽은 분야는 경계가 없었습니다. 이 방대한 독서의 결과물이 바로 그의 대표 저작으로 이어집니다.

청장관전서 : 한 사람의 지식이 담긴 백과사전

이덕무의 대표작은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입니다.

청장관은 그의 호이기도 했는데, 이 책은 그가 평생 쌓은 지식과 기록을 모은 방대한 문집입니다.

 

총 71권에 달하는 이 책에는 시문(詩文)은 물론이고, 조선과 중국의 역사, 풍속, 인물, 언어, 문물에 대한 다양한 기록이 담겨 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개인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사소절(士小節)』이라는 글은 선비가 일상에서 지켜야 할 예절과 몸가짐을 담은 것으로, 당시 생활 문화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습니다. 또한 아동 교육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어, 교육 사상사 측면에서도 가치가 높습니다.

 

이덕무의 글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실제 삶과 문화를 촘촘히 기록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조선 후기 생활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청장관전서는 없어서는 안 될 자료입니다.

규장각 검서관 : 뒤늦게 열린 문

이덕무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정조의 등장입니다.

1776년 왕위에 오른 정조(正祖)는 개혁적인 군주였습니다.

그는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하고 학문을 장려하기 위해 규장각(奎章閣)이라는 왕립 도서관 겸 연구 기관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서얼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동안 관직에 오르지 못했던 학자들을 검서관(檢書官)으로 발탁했습니다.

 

이덕무는 바로 이 검서관으로 임명됩니다.

당시 함께 등용된 인물들은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 등으로, 이들은 훗날 규장각 사검서(四檢書)라 불리며 북학파를 대표하는 학자 집단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덕무에게 규장각 생활은 단순한 취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평생 쌓아온 지식을 세상에 펼칠 수 있는 기회였고, 국가의 기록 사업에 참여하는 영예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수많은 서적을 정리하고, 왕실의 지식 사업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유득공 : 사라진 나라의 역사를 되살린 학자

유득공 발해고 발해사 연구 설명 이미지

북학파의 핵심, 배움에는 방향이 있다

유득공은 1748년에 태어났습니다. 그 역시 서얼 출신이었고, 이덕무와 마찬가지로 규장각 검서관으로 활동했습니다.

하지만 유득공의 학문적 열정은 특히 역사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박제가, 이덕무 등과 함께 북학파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습니다. 북학파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유득공도 이 사상을 공유하며 중국의 역사 연구 방법과 고증학의 영향을 깊이 받았습니다.

발해고 : 잊혀진 나라를 역사로 불러내다

유득공의 이름을 오늘날까지 빛나게 하는 것은 단연 『발해고(渤海考)』입니다.

1784년에 저술된 이 책은,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작업이었습니다.

발해는 698년 대조영이 세운 나라로, 고구려 멸망 이후 그 유민들이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세운 왕국이었습니다.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약 230년 동안 존속했지만, 이후 오랫동안 역사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유득공이 이 책을 쓰기 전까지, 대부분의 조선 학자들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의 역사만을 한국사의 정통 흐름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발해는 그 시야 밖에 있었던 것입니다.

 

유득공은 이에 강하게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신라가 남쪽에 있고 발해가 북쪽에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남북국(南北國)이다. 발해의 역사를 짓지 않은 것은 고려의 잘못이다."

이 짧은 문장 하나가 역사 인식의 지형을 바꾸는 선언이었습니다.

발해사 연구의 의미 : 우리 역사의 경계를 넓히다

『발해고』는 총 9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군주, 신하, 지리, 관직, 의례, 산물, 언어, 외교 등 발해의 전반적인 역사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정리했습니다.

 

유득공이 이 작업을 통해 주장한 것은 단순한 사실 나열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 국가로 보았고, 따라서 신라와 발해가 공존했던 시기를 남북국 시대로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한국 역사 교과서에도 영향을 미친 중요한 시각입니다.

남북국 시대라는 개념 자체가 유득공에서 비롯된 것이며, 발해를 한국사의 일부로 보는 현대의 역사 인식이 그의 연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만약 유득공이 이 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발해는 훨씬 오랫동안 우리 역사의 바깥에 머물러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북학파 실학자들 : "청나라에서 배우자"

이덕무와 유득공을 이해하려면, 그들이 속한 북학파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박제가와의 동지적 관계

두 사람의 가장 가까운 동료 중 한 명이 바로 박제가(朴齊家)였습니다.

박제가는 『북학의(北學議)』를 저술한 북학파의 대표 이론가로, 조선이 가난하고 낙후된 이유는 청나라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세 사람은 함께 규장각 검서관으로 활동하며 학문적 동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들은 서로의 글을 읽고 비평하며, 조선의 현실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함께 고민했습니다.

청나라 문물을 배워야 한다

당시 많은 조선 학자들은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로 여기며 배척했습니다.

명나라를 섬기던 전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북학파는 달리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기술이 우리보다 앞서 있다면, 배우는 것이 맞다."

수레와 선박 기술, 상업과 유통 시스템, 농업 기구와 건축 방식  북학파는 이 모든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도입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실용적인 해법을 찾는 것이 그들의 방식이었습니다.

 

이런 열린 사고방식은 이덕무의 박학다식한 기록 정신과도, 유득공의 객관적인 역사 연구 태도와도 맞닿아 있었습니다.


두 사람을 나란히 놓고 보면

공통점 : 같은 시대, 같은 출발점

이덕무와 유득공에게는 놀랍도록 닮은 점이 많습니다.

 

우선 둘 다 서얼 출신이었습니다.

신분 제도의 장벽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학문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는 공통된 삶의 궤적이 있습니다.

 

또한 둘 다 북학파 실학자로서 조선의 현실을 개혁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했습니다.

공허한 이론보다는 실제 현실에 도움이 되는 지식을 추구했고, 기록과 연구를 학문의 핵심 방법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둘 다 정조의 규장각 검서관으로 활동하며, 국가적 차원의 지식 사업에 참여했습니다.

신분의 한계를 넘어 역량을 인정받은 인물들이었습니다.

차이점 : 다른 방향을 향한 두 개의 붓

그러나 두 사람이 향한 방향은 달랐습니다.

 

이덕무의 학문은 폭(幅)이 특징이었습니다.

그는 조선과 중국의 역사, 문학, 풍속, 언어, 생활 예절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읽고, 정리하고, 기록했습니다. 청장관전서는 그 방대한 지식의 집대성입니다. 그에게 기록이란 세상 모든 것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유득공의 학문은 깊이(深)가 특징이었습니다.

그는 발해라는 하나의 주제를 붙들고, 그것을 끝까지 파고들었습니다. 흩어진 자료를 모으고, 사실을 확인하고, 역사적 논리를 세워나갔습니다. 발해고는 그 집요한 탐구의 결실입니다. 그에게 기록이란 잊힌 것을 되살리는 행위였습니다.

 

넓게 쓴 이덕무, 깊게 판 유득공.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목표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후대에 남겨야 할 것을 남기는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남긴 것

기록이 역사가 된다

이덕무가 남긴 청장관전서 덕분에 우리는 조선 후기 선비들의 일상과 생활 문화를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가 꼼꼼하게 적어둔 음식 문화, 언어 표현, 예절 방식들은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학자들이 참고하는 소중한 자료입니다.

유득공의 발해고는 그보다 더 큰 파장을 남겼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제기한 남북국 시대론은 이후 조선 말기와 근대 역사학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오늘날 한국사 교과서에서 발해를 한국사의 일부로 다루는 인식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만약 유득공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면, 발해는 지금도 중국사나 만주사의 영역으로만 분류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붓을 들었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 지도는 그만큼 더 넓어졌습니다.

서얼도 역사를 바꿀 수 있다

두 사람의 삶은 또 다른 메시지를 전합니다.

신분의 벽이 가로막고 있던 시대에도, 꾸준한 공부와 기록의 힘은 결국 세상을 움직였습니다.

이덕무와 유득공은 서얼이라는 불리한 출발점에서 시작했지만, 그들이 남긴 지적 유산은 정통 양반 학자들 못지않게 어쩌면 그보다 더 한국 문화사와 역사학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성공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록이 지닌 힘, 지식이 지닌 평등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정리 : 왜 기록은 중요한가

이덕무와 유득공이 살았던 18세기 조선은 변화와 갈등이 공존하는 시대였습니다.

신분 제도는 여전히 굳건했고, 낡은 사상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현실에 굴하지 않고 붓을 들었습니다.

이덕무는 자신이 읽고 배운 모든 것을 종이 위에 옮겼고, 유득공은 역사 속에 잠들어 있던 나라를 깨워 다시 세웠습니다.

그들이 남긴 기록은 단순한 책이 아닙니다. 시간을 뛰어넘는 다리입니다. 수백 년 전의 삶과 사유가 오늘의 우리에게 닿을 수 있는 것은, 누군가 포기하지 않고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기록하는 자의 것입니다.

이덕무와 유득공은 기록을 통해 조선의 지식과 역사를 후대에 남긴 대표적인 실학자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