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의 침입] 서희의 외교 담판과 강감찬의 귀주대첩, 그리고 천리장성

2025. 11. 5. 11:00역사 Detox_한국사를 알아보자/🏯 중세: 고려 시대

프롤로그: 북방에서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

광종의 개혁으로 고려는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가 되었습니다.

성종(981~997) 시대에는 유교 정치가 확립되고, 문벌 귀족 사회가 안정되었으며, 경제도 발전하고 문화도 꽃피었습니다. 고려는 평화로운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북쪽에서 거대한 위협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거란(契丹, 요나라)이었습니다.

거란은 중국 북방 유목민족으로, 916년 거란족 추장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거란국을 세웠고, 947년 국호를 ()로 바꿨으며, 중국 북부를 점령하고 막강한 기마군단을 보유한 대제국이었습니다. 거란은 고려를 노렸습니다. 고려가 송나라와 친하다는 것이 불만이었고(거란과 송나라는 적대 관계), 고려의 영토가 탐났으며, 특히 옛 고구려 을 차지하고 싶었습니다.

993년부터 1019년까지 약 26년간, 거란은 고려를 세 차례나 침공했습니다. 각각 수십만 대군을 동원한 대규모 전쟁이었고, 고려는 생존을 건 싸움을 벌여야 했으며,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였습니다.

 

"서희는 어떻게 말로 거란군을 물리쳤을까?",

"강감찬은 어떻게 수십만 대군을 격파했을까?",

"귀주대첩은 왜 대첩인가?",

"천리장성은 왜 쌓았을까?"

 

오늘은 고려가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고 위기를 기회로 바꾼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 거란의 등장: 북방의 새로운 강자

거란은 누구인가?

거란(契丹)은 몽골계 유목민족입니다.

중국 동북쪽 초원 지대에 살았고(지금의 내몽골, 만주), 유목 생활을 하며 말을 타고 양을 기르고, 뛰어난 기마 전술로 유명했으며, 전사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10세기 초까지 거란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통일된 국가가 없었고,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처지였으며, 변방의 작은 세력이었습니다.

916,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872~926년)가 거란 부족을 통일하고, 거란국을 세웠으며, 황제를 칭했습니다(태조).

야율아보기는 탁월한 군사 지도자였습니다. 거란 부족을 통일하고, 주변 유목 민족을 정복했으며, 중국 북부로 진출했고, 발해를 멸망시켰습니다(926).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것은 고려에게 충격이었습니다. 발해는 옛 고구려 유민이 세운 나라로, 고려와 같은 민족으로 여겼고(남북국 시대), 200년 넘게 존속했지만, 거란에게 무너졌으며, "다음은 우리 차례인가?" 고려는 불안해했습니다.

 

야율아보기
야율아보기 / 출처 : 먼지투성이 문서고

 

요나라의 성장

947, 거란이 국호를 ()로 바꿨습니다.

중국식 황제 국가를 표방했고, 중국 북부(베이징 포함)를 차지했으며, 송나라와 대등하게 겨뤘습니다. 요나라의 영토는 광대했습니다. 동쪽으로는 만주 전체, 서쪽으로는 몽골 초원, 남쪽으로는 중국 북부(만리장성 이북), 북쪽으로는 시베리아까지 영향력을 뻗쳤고, 인구 수백만의 대제국이었습니다. 요나라의 군사력은 막강했습니다. 수십만 기마군단으로, 빠르고 강력했으며, 송나라 군대도 이기지 못했고, 동아시아 최강이었습니다.

요나라 지도 / 출처 : 나무위키

 

고려에 대한 압박

요나라는 고려에 계속 압박을 가했습니다.

942, 거란이 고려에 사신을 보냈습니다. 태조 왕건이 거란 사신을 냉대했고, 낙타 50마리를 만부교(萬夫橋) 밑에 매어 굶겨 죽였으며(유명한 일화), "거란은 우리 적이다" 선언했습니다.

왕건이 훈요십조에 남긴 말: "거란은 짐승과 같은 나라다. 친하지 마라."

이후 고려는 송나라와 친하게 지냈습니다. 송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고, 무역을 했으며, 문화를 교류했고, 송나라가 주는 책력(曆法)을 사용했습니다.

요나라는 이것이 불만이었습니다. "고려가 송나라 편이다", "우리를 무시한다", "압박을 가해 굴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993년 마침내 침공을 결정했습니다. 고려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요나라는 송나라보다 강했고, 군사력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었으며, 외교로 풀어야 했습니다.

 

💬 993 1차 침입: 서희의 외교 담판

소손녕의 80만 대군

993(성종 12) 10, 요나라가 대대적인 침공을 시작했습니다. 요나라 장군 소손녕(蕭遜寧)이 총사령관이 되어, 80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했고(과장된 숫자일 수 있으나 수십만은 확실), 압록강을 건너 고려 영토로 진입했으며,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습니다. 변경의 고려군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숫자가 너무 적었고, 요나라 기병이 너무 강했으며, 성을 버리고 도망쳤고, 봉산군(鳳山郡, 평안북도)까지 순식간에 함락되었습니다.

고려 조정은 패닉에 빠졌습니다. 성종은 긴급 회의를 소집했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신하들에게 물었으며, 의견이 둘로 갈렸습니다.

항복파 "요나라가 너무 강하다. 싸워봐야 진다. 항복하고 신하국이 되자"고 주장했고, 서경(평양)을 넘겨주고 화친하자고 했습니다.

항전파 "절대 안 된다. 한 번 굴복하면 끝없이 요구할 것이다. 끝까지 싸우자"고 외쳤지만, 승산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나섰습니다. 서희(徐熙, 942~998)였습니다.

 

서희는 누구인가?

서희는 문벌 귀족 출신입니다. 할아버지 대부터 고위 관료 집안으로, 과거 시험에 급제했고, 뛰어난 외교관이자 전략가였으며, 성종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서희가 말했습니다. "제가 가서 협상하겠습니다", "전쟁보다 외교가 먼저입니다", "말로 적을 물리치는 것이 최선입니다"

성종은 고민 끝에 서희를 보내기로 했고, 서희가 요나라 진영으로 향했습니다.

 

고려 태보 내사령 장위공 서희
서희 초상화 / 출처 : 나무위키

 

담판의 순간

993 11, 서희가 요나라 진영에 도착했습니다.

소손녕이 서희를 맞이했고, 거만한 태도로 협박했으며, 회담이 시작되었습니다.

 

소손녕: "고려는 신라가 차지한 땅에 세워진 나라다. 고구려 땅은 우리 요나라 것이다. 압록강 이북을 내놓아라!" (요나라의 주장은 발해를 멸망시켰으니 고구려 땅의 주인이라는 논리)

소손녕: "그리고 고려는 왜 우리를 무시하고 송나라와 친하게 지내는가? 송나라와 국교를 끊고 우리에게 조공을 바쳐라!" 서희는 침착하게 대답했습니다.

서희: "장군의 말씀이 틀렸습니다. 우리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나라 이름도 '고려'입니다." (고려 = 고구려 계승국)

서희: "고구려 땅의 정통 계승자는 바로 우리 고려입니다. 요나라가 아닙니다." (정면 반박)

소손녕: "......" (논리에 막힘)

서희: "그리고 우리가 송나라와 교류하는 이유는 당신네 요나라 때문입니다. 우리는 육로로 중국과 교류하고 싶지만, 요나라가 여진족을 시켜 길목을 막고 있지 않습니까?" (역공)

서희: "만약 요나라가 여진을 몰아내고 우리에게 옛 고구려 땅(압록강 동쪽)을 돌려준다면, 우리는 송나라와 교류를 끊고 요나라와 친하게 지내겠습니다." (제안)

 

소손녕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서희의 논리가 일리가 있었고, 싸우지 않고 고려를 복속시킬 수 있다면 좋은 것이었으며, 황제에게 보고하기로 했습니다. 요 성종(耶律隆緖)이 서희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고려에게 땅을 주고 신하국으로 만들면 된다", 송나라와 고려의 연대를 끊을 수 있으니 이득이라 판단했고, 협상이 성립되었습니다.

 

993년 협상의 결과

서희의 담판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강동 6주 획득 - 요나라가 압록강 동쪽 땅을 고려에 넘겨줬고, 강동 6(江東六州): 흥화, 용주, 통주, 철주, 귀주, 곽주였으며, 넓은 영토를 전쟁 없이 얻었습니다.

요나라군 철수 - 80만 대군이 물러갔고, 전쟁 없이 평화가 왔으며, 고려는 안도했습니다.

명목상 사대 관계 - 고려가 요나라에 형식적으로 조공을 바치기로 했지만, 실제로는 대등한 관계였고, 주권은 유지했으며, 송나라와도 계속 교류했습니다(몰래).

 

서희의 업적은 대단했습니다.

전쟁 없이 승리 - 한 사람도 죽지 않고 위기를 해결했고, 말의 힘으로 적을 물리쳤으며, 외교의 승리였습니다.

영토 확장 - 강동 6주를 얻어 압록강까지 영토를 확대했고, 천연 방어선을 확보했으며, 전략적 가치가 컸습니다.

국가 위신 확보 - 요나라에 굴복하지 않았고, 대등한 협상을 이끌어냈으며, 고려의 자존심을 지켰습니다. 서희는 영웅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이 환호했고, "말 한마디로 80만 대군을 물리친 명장" 칭송받았으며, 고려 역사상 최고의 외교관으로 평가받습니다.

강동 6주 지도
강동 6주 지도 / 출처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 1010 2차 침입: 현종의 시련

강조의 정변

993년 이후 고려와 요나라는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형식적으로는 사대 관계였지만, 실제로는 대등했고, 송나라와도 계속 교류했으며(요나라 몰래), 긴장은 계속되었습니다. 997년 성종이 승하하고, 아들 목종(穆宗, 재위 997~1009)이 즉위했습니다.

어머니 천추태후(千秋太后)가 섭정했고, 천추태후는 김치양(金致陽)과 부적절한 관계였으며(스캔들), 정치가 문란해졌습니다.

1009, 장군 강조(康兆)가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을 제거하고, 목종을 폐위하고 죽였으며, 목종의 사촌 현종(顯宗)을 왕으로 옹립했습니다.

강조의 정변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쿠데타로 왕을 죽인 것으로, 정통성이 없었고, 신하가 왕을 시해한 반역이었으며, 요나라에 빌미를 줬습니다.

요나라는 분노했습니다. "고려에서 반역이 일어났다", "우리가 인정한 목종을 죽였다", "응징해야 한다"며 출병을 결정했고, 실제로는 고려를 정복하려는 야심이었습니다.

 

1010 40만 대군의 침공

1010(현종 원년) 12, 요나라가 다시 침공했습니다.

요 성종이 직접 출정했고, 40만 대군을 이끌었으며, 1차 침입보다 규모가 컸고, 명분도 있었습니다("반역자 강조를 처단한다"). 요군은 빠르게 남하했습니다. 고려 변경 방어선을 돌파했고, 청천강을 건넜으며, 서경(평양)으로 향했습니다. 강조가 고려군을 이끌고 맞섰습니다.

통주(지금의 선천) 전투에서 강조가 요군과 맞붙었지만, 크게 패배했고, 강조는 포로가 되었으며(후에 처형됨), 고려군 주력이 무너졌습니다.

요군은 서경(평양)을 함락시켰고, 계속 남하했으며, 수도 개경(개성)으로 향했습니다.

현종은 공포에 떨었습니다. 즉위한 지 1년도 안 됐는데, 나라가 망할 위기였고, 신하들이 권했습니다: "전하, 피난 가셔야 합니다!" 현종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남쪽으로 피난하기로 했고, 1011 1월 개경을 떠나 나주(전라도)까지 피난했으며, 왕이 수도를 버린 굴욕이었습니다.

 

개경 함락과 평화 협상

1011 1, 요군이 개경에 입성했습니다.

고려 수도가 적에게 함락되었고, 궁궐이 불탔으며, 약탈이 자행되었고, 백성들이 고통받았습니다. 하지만 요 성종은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개경을 점령했지만 고려 왕을 잡지 못했고, 남쪽까지 추격하기는 너무 멀었으며, 보급이 어려워졌고, 고려 백성들의 저항이 거셌습니다. 요 성종이 협상을 제안했습니다. "현종이 직접 와서 항복하면 군대를 철수하겠다", 하지만 현종은 거부했고, 신하들이 대신 협상에 나섰습니다.

결국 타협이 이뤄졌습니다.

고려의 사죄 - 강조의 정변을 사죄하고, 현종이 요나라에 조공을 바치기로 약속했으며,

요군 철수 - 요나라가 개경에서 철수하고, 포로들을 일부 돌려줬으며,

명목상 승리? - 요나라는 "고려가 굴복했다"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고려를 완전히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1011년 봄, 요군이 철수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종이 개경으로 돌아왔고, 불탄 궁궐을 재건했으며, 치욕을 씻기 위해 준비했습니다.

 

⚔️ 1018~1019 3차 침입: 강감찬의 귀주대첩

소배압의 10만 대군

1011년 이후 고려와 요나라는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고려가 신하국이었지만, 실제로는 독자적으로 행동했고, 요나라는 불만이었으며, 다시 한 번 응징하기로 했습니다.

1018(현종 9) 12, 요나라가 세 번째 침공을 시작했습니다. 요나라 장군 소배압(蕭排押)이 총사령관이 되어, 10만 대군을 이끌었고(이번에는 과거보다 적지만 정예), "고려를 완전히 굴복시킨다"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고려는 준비되어 있었고, 1010년 굴욕을 잊지 않았으며, 반드시 이기겠다는 각오였고, 그리고 고려에는 강감찬(姜邯贊, 948~1031)이 있었습니다.

낙성대 공원 강감찬 장군
낙성대 공원 강감찬 장군 / 출처 : 오피니언 뉴스

 

강감찬은 누구인가?

강감찬은 문신 출신 장군입니다. 광종 과거에 급제했고(971, 23), 뛰어난 학자였지만 무예도 뛰어났으며, 현종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키가 작고 못생겼다고 전해지지만(『고려사』 기록), 지략이 뛰어났고, 차분하고 침착했으며, 위기에 강했습니다. 현종이 강감찬을 상원수(上元帥, 총사령관)로 임명했고, 부원수 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20만 고려군을 지휘했으며(총동원), "이번에는 반드시 이긴다" 다짐했습니다.

 

1019 1: 귀주를 향한 전투

1018 12월부터 1019 2월까지 약 3개월간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요군이 압록강을 건너 남하했고, 고려군이 곳곳에서 저항했으며,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습니다. 강감찬은

지구전 전략을 썼습니다. 정면 대결을 피하고, 곳곳에서 기습 공격을 했으며, 요군을 지치게 만들었고, 보급로를 차단했습니다.

흥화진 전투 - 압록강 근처에서 요군 선봉을 격파했고, 수천 명을 사살했으며, 사기를 꺾었습니다. 요군은 계속 남하했지만 피해가 누적되었고, 보급이 부족해졌으며, 사기가 떨어졌습니다.

소배압은 고민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위험하다", "개경까지 가기 어렵다", "철수하는 것이 낫다" 판단하고, 1019 2, 철수를 명령했습니다. 요군이 북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고려군이 추격했으며, 강감찬이 기다렸던 순간이었습니다.

 

1019 2: 귀주에서의 대승

요군이 귀주(龜州, 지금의 구성)에 도달했습니다.

압록강 남쪽의 요충지로, 여기만 넘으면 안전했지만, 강감찬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강감찬이 귀주 주변을 포위했습니다. 요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고려군 20만이 10만 요군을 포위했으며, 완벽한 포위망이었습니다.

1019 2월 말, 귀주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고려군이 사방에서 공격했고, 화살이 비오듯 쏟아졌으며, 요군이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포위망을 뚫을 수 없었습니다.

 

귀주 대첩 상상도
귀주 대첩 상상도 / 출처 : 위키백과

 

며칠간의 격전 끝에 요군이 붕괴되었습니다. 수만 명이 전사했고, 수만 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소배압도 간신히 목숨만 건졌고, 10만 대군 중 살아서 돌아간 자가 수천 명뿐이었습니다.

『고려사』의 기록: "귀주에서 크게 이기니, 적군 시체가 들판을 덮었다. 포로와 노획한 말, 낙타, 병기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강감찬과 고려군이 개경으로 개선했습니다. 백성들이 거리로 나와 환호했고, "만세! 만세!" 외쳤으며, 현종이 직접 마중 나와 치하했고, "나라를 구한 영웅" 칭송받았습니다.

 

귀주대첩의 의미

귀주대첩은 고려사 최대의 승리 중 하나입니다.

완벽한 대승 - 10만 요군을 거의 전멸시켰고, 역사적 대첩으로 기록되었으며, 동아시아에 고려의 위용을 떨쳤습니다.

요나라의 포기 - 이후 요나라는 고려 침공을 포기했고, "고려는 만만한 나라가 아니다" 깨달았으며,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강감찬의 영웅화 - 70대 노장의 대활약으로, 문신이지만 위대한 장군이 되었고,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지금도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 인물 중 한 명입니다.

국가적 자신감 - 1010년 굴욕을 설욕했고, "우리도 대제국을 이길 수 있다" 자신감을 얻었으며, 고려의 자존심을 회복했습니다.

평화의 기반 - 이후 100년 넘게 요나라와 평화를 유지했고, 문화와 경제가 발전했으며, 고려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 천리장성: 영원한 평화를 위해

1033~1044: 11년의 대역사

귀주대첩 이후 고려는 안심할 수 없었습니다.

요나라가 다시 올 수도 있었고, 여진족의 침입도 계속되었으며, 영구적인 방어 시설이 필요했습니다.

1033(덕종 2), 고려가 대규모 토목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천리장성(千里長城) 축조였습니다. 압록강 하구에서 동해안까지 성벽을 쌓아, 북방 오랑캐를 막겠다는 계획이었고, 중국 만리장성처럼 거대한 방어선을 만들려 했습니다.

천리장성의 규모는 어땠을까요? 길이: 1,000( 4005m, 돌과 흙으로 쌓았으며, 성곽: 곳곳에 요새와 보루를 설치했고, 병사들이 주둔했습니다.

고구려(빨강)와 고려(파랑)의 천리장성으로 추정되는 구간
고구려(빨강)와 고려(파랑)의 천리장성으로 추정되는 구간 / 출처 : 나무위키

 

축조 과정은 엄청난 국가적 사업이었습니다.

인력 동원 - 전국에서 수십만 명이 동원되었고, 백성들이 강제로 징발되었으며, 노역이 매우 힘들었습니다.

재정 부담 - 막대한 비용이 들었고, 세금이 증가했으며, 국가 재정을 압박했습니다.

11년 대역사 - 1033년 시작해서 1044년 완공되었고, 11년이나 걸린 대공사였으며, 수많은 사람이 고생하고 죽었습니다. 천리장성의 효과는 어땠을까요?

방어력 증대 - 북방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았고, 여진족 약탈이 줄어들었으며, 국경 방어가 안정되었습니다.

심리적 안정 -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었고, 전쟁 공포가 줄어들었으며, 국가 위신이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한계도 있었습니다. 유지 관리가 어려웠고, 시간이 지나면서 무너지는 곳도 생겼으며, 완벽한 방어는 아니었고(우회 가능), 막대한 국력 소모로 백성들 부담이 컸습니다. 그래도 천리장성은 고려의 의지를 보여줬습니다. "우리는 다시는 침략당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지킨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다짐이었고, 고려 백성들의 희생과 노력의 결정체였습니다.

 

 

💭 에필로그: 위기를 기회로

993년부터 1019년까지 26년간의 전쟁은 고려를 단련시켰습니다.

세 차례 침공을 모두 이겨냈고, 영토를 지키고 넓혔으며, 국가적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서희의 담판은 외교의 승리였습니다. 말의 힘으로 적을 물리쳤고, 전쟁 없이 영토를 확장했으며, 지혜가 무력보다 강함을 증명했고, 한국 외교사의 금자탑이 되었습니다.

강감찬의 귀주대첩은 군사적 승리였습니다. 70대 노장의 대활약으로, 완벽한 전략으로 대제국을 격파했으며, 고려인의 자부심이 되었고, 민족의 영웅으로 영원히 기억되었습니다.

거란 전쟁 이후 고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100년 평화 - 1019년 이후 요나라와 큰 전쟁이 없었고, 천리장성으로 국경이 안정되었으며, 평화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문화 발전 - 전쟁이 끝나자 문화가 꽃피었고, 팔만대장경 조판 시작, 고려청자 발달, 서적 인쇄 등이 이루어졌으며, 고려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문벌 귀족 사회 완성 - 과거 출신 관료들이 귀족화되었고, 대대로 권력을 독점했으며, 안정적이지만 경직된 사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문제도 생겼습니다.

이자겸의 난 (1126) - 외척이 권력을 독점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며, 왕권이 약해졌습니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1135) - 서경(평양)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고, 지역 갈등이 표면화되었습니다.

무신 정변 (1170) - 무신들이 문신 귀족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으며, 고려 후기 혼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더 큰 위협이 찾아옵니다. 몽골 침입(13세기)이 그것입니다.

 

거란 전쟁이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외교와 군사의 조화 - 서희의 외교와 강감찬의 군사력 모두 필요했고, 하나만으로는 부족했으며, 지혜와 용기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위기는 기회 - 거란 침입은 위기였지만, 이를 극복하며 국가가 강해졌고, 시련이 고려를 단련시켰으며, 고난이 영웅을 만들었습니다.

민족의 단결 - 외적 앞에서 고려인들이 하나가 되었고, , 신하, 백성이 함께 싸웠으며, 단결이 승리의 비결이었습니다.

 

서희와 강감찬은 지금도 한국인의 가슴에 살아 있습니다. 위기의 순간 지혜와 용기로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조상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 핵심 정리

거란 침입 3차 타임라인

연도 사건 내용
916년 거란국 건국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거란 부족들을 통합하고 황제에 올라 거란국을 건국함.
926년 발해 멸망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영토를 확장하며 고려의 북방에 강력한 위협으로 등장함.
947년 국호 변경 거란국이 국호를 '요(遼)'로 변경함.
993년 (1차 침입) 제1차 고려-거란 전쟁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 고려의 서희가 외교 담판에 성공하여 전쟁을 피하고 강동 6주를 획득함.
1010년 (2차 침입) 제2차 고려-거란 전쟁 소배압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 고려의 강조가 패배하고 처형되며 개경이 함락됨. 고려 현종이 나주까지 피난하는 등 위기를 겪었으나, 거란군이 철수함.
1018년 ~
1019년 (3차 침입)
제3차 고려-거란 전쟁 소배압이 10만 대군으로 재침공. 고려의 강감찬 장군이 귀주대첩(龜州大捷)에서 거란군을 거의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며 거란의 침략 의지를 완전히 꺾음.
1033년 ~ 1044년 천리장성 축조 3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압록강 하구부터 동해안까지 11년에 걸쳐 천리장성을 축조하여 국경 방어선을 강화함.

 

3차 침입 비교

구분 1 (993) 2 (1010) 3 (1018~19)
사령관 소손녕 요 성종 직접 소배압
병력 80 (과장?) 40 10 (정예)
고려 대응 서희 외교 담판 강조 패배, 개경 함락 강감찬 총지휘
결과 강동 6주 획득 형식적 항복 귀주대첩 대승
의미 외교 승리 굴욕적 패배 완벽한 설욕

 

서희 vs 강감찬

구분 서희 (942~998) 강감찬 (948~1031)
출신 문벌 귀족 과거 출신 문신
전공 993년 외교 담판 1019년 귀주대첩
방법 외교, 협상 군사, 전략
성과 강동 6주 획득 요군 전멸
평가 최고의 외교관 최고의 장군
공통점 말과 지혜로 나라를 구함 용기와 전략으로 승리

 

귀주대첩의 위대함

전술적 승리

  • 20 vs 10, 포위 섬멸
  • 요군 거의 전멸 (생존자 수천)
  • 완벽한 승리

전략적 의미

  • 요나라 침공 포기
  • 100년 평화 확보
  • 국가 자신감 회복

역사적 평가

  • 고려사 3대 대첩 중 하나
  • 동아시아 전쟁사의 명전투
  • 강감찬 = 민족 영웅

천리장성

규모: 400동해안)

기간: 1033~1044 (11)

효과: 북방 방어 강화, 심리적 안정

한계: 유지 관리 어려움, 백성 부담

의미: 고려의 자주 국방 의지

 

📚 참고 자료 및 더 알아보기

방문할 수 있는 곳

강감찬 동상 - 서울 낙성대 | 강감찬 출생지 전설 | 동상과 기념관

귀주 전적지 (북한) - 북한 평안북도 | 방문 불가 | 귀주대첩 장소

개성 (북한) - 방문 불가 | 1010년 함락당한 고려 수도

국립중앙박물관 - 고려실 | 거란 전쟁 관련 유물

전쟁기념관 - 서울 용산 | 귀주대첩 전시

 

추천 도서

『서희와 강감찬』(역사서) / 『귀주대첩』(군사사) / 『거란의 침입과 고려의 대응』(학술서) / 『강감찬 평전』(일반 교양)

 

드라마/영화

드라마 『천추태후』(2009) - KBS / 강조의 정변과 거란 침입 배경

영화 『귀주대첩』(미제작, 제작 논의 중)

 

온라인 자료

국립중앙박물관: https://www.museum.go.kr / 전쟁기념관: https://www.warmemo.or.kr /

문화재청: https://www.heritage.go.kr / 국사편찬위원회: https://db.history.go.kr


다음 포스팅 예고: 👥 고려 무신 정변! 문신 귀족은 왜 몰락했나?

이전 포스팅: 🏛️ 광종의 개혁 | 👑 왕건의 후삼국 통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