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 vs 이성계 — 고려의 마지막 선택은 왜 갈렸을까

2026. 5. 18. 11:47역사 Detox_한국사를 알아보자

최영 이성계 비교 고려말 조선건국 역사 썸네일

 

두 장군, 하나의 시대

고려 말, 두 명의 장군이 역사의 중심에 섰다.

한 명은 최영(崔瑩). 평생을 고려를 위해 싸운 노장(老將)이었다. 청렴하고 강직했으며,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또 한 명은 이성계(李成桂). 변방 출신의 무장으로, 탁월한 전투 능력으로 빠르게 이름을 높인 장군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나라를 섬겼다. 같은 전장에서 싸웠다. 그런데 역사의 갈림길에서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

최영은 고려를 지키려 했다. 이성계는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왜 두 사람의 선택은 이토록 달랐을까. 그 답을 찾으려면 먼저 고려 말의 혼란한 시대로 들어가야 한다.


흔들리는 고려, 무너지는 질서

14세기 고려는 안팎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밖에서는 국제 정세가 급변했다. 오랫동안 동아시아를 지배하던 원(元)나라가 급격히 쇠퇴했다. 중국 대륙에서는 한족 반란이 이어졌고, 마침내 주원장(朱元璋)이 1368년 명(明)나라를 세웠다.

이 원·명 교체는 고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고려는 오랫동안 원나라의 간섭 아래 있었다. 왕실은 원나라 공주와 혼인했고, 고려 왕은 원나라에 충성을 바쳐야 했다. 그런데 원나라가 무너지자 고려 안에서 혼란이 일었다. 친원파와 친명파가 갈렸고, 권력 다툼이 격화됐다.

안에서는 권문세족(權門勢族)의 횡포가 극심했다.

권문세족은 원나라의 힘을 등에 업고 성장한 귀족 세력이다. 이들은 불법으로 토지를 빼앗고, 양민을 노비로 만들었다. 나라의 재정은 바닥났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여기에 왜구(倭寇)의 침략이 더해졌다.

왜구는 일본 해적 집단으로, 고려 해안을 수시로 약탈했다. 곡식을 빼앗고 사람을 납치했다. 고려의 조운선(漕運船,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나르는 배)이 자주 습격당해 나라 살림이 더욱 어려워졌다.

이런 혼란 속에서 군사력이 있는 장군들의 존재가 커졌다. 그리고 최영과 이성계가 역사의 무대 위로 올라섰다.


최영 —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최영 고려 충신 왜구 토벌 설명 이미지

 

최영(1316~1388)은 고려의 무장 가문 출신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이 가르침을 평생 지켰다. 권력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았고, 재물을 탐하지 않았다. 죽는 날까지 청렴했다.

 

최영은 무엇보다 탁월한 전투 지휘관이었다.

1376년, 왜구가 충청도 홍산(鴻山)까지 밀고 올라왔다.

최영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가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이것이 홍산대첩이다. 이 전투에서 최영은 60세를 넘긴 나이임에도 직접 말을 타고 싸웠다.

같은 시기 이성계도 동북면(지금의 함경도)에서 왜구와 싸워 공을 세웠다. 두 장군은 서로 다른 전선에서 고려를 지키고 있었다.

 

1388년, 최영은 정치 권력의 핵심에 선다.

당시 고려 왕은 우왕(禑王)이었다. 최영은 우왕의 신임을 받았고, 사실상 고려 군사와 정치를 주도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큰 결정을 내린다.

바로 요동 정벌이다.

 

명나라가 고려 북쪽 영토인 철령(鐵嶺) 이북 지역에 대한 관할권을 주장했다. 최영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원나라가 물러난 틈을 타 요동을 공격해 영토를 회복하자고 주장했다.

최영의 논리는 단순하고 강했다.

명나라의 무리한 요구에 굴복할 수 없다. 군사를 일으켜 맞서야 한다.

최영은 고려의 자존심을 지키려 했다. 그것이 나라를 지키는 길이라고 믿었다.


이성계 — 4불가론과 위화도 회군

이성계 위화도회군 조선 건국 설명 이미지

 

이성계(1335~1408)는 동북면 출신의 무장이다.

함경도 일대에서 성장하며 여진족과 왜구를 상대로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전투마다 승리했다. 이름이 전국에 퍼졌다. 고려 말 최고의 장군 중 한 명으로 꼽히게 됐다.

이성계는 요동 정벌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반대했다.

 

이성계는 4불가론(四不可論)을 내세웠다.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옳지 않다.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무리다.

셋째, 요동을 공격하면 왜구가 그 틈을 타 내지를 침략할 것이다.

넷째, 장마철에 활의 아교가 풀리고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위험이 있다.

 

이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정벌의 부당함을 주장했지만, 최영과 우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성계는 어쩔 수 없이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1388년, 압록강 하구의 위화도(威化島)에 이른다.

거기서 이성계는 멈췄다.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대신 군사를 돌렸다. 개경으로 회군했다. 이것이 역사에서 위화도 회군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이성계는 개경으로 돌아와 최영을 제거했다.

최영은 유배지에서 처형됐다. 우왕은 폐위됐다.

권력이 이성계에게로 넘어왔다.

이성계는 곧장 새 나라를 세우진 않았다. 하지만 위화도 회군 이후 고려의 운명은 사실상 결정됐다.

이후 이성계 세력은 토지 개혁(과전법)을 단행하고, 정치 세력을 재편했다. 그리고 1392년, 마침내 조선(朝鮮)을 건국했다.


왜 두 사람의 선택은 갈렸나

최영과 이성계, 두 사람의 선택이 갈린 이유는 단순히 성격 차이가 아니었다.

 

국제 정세 판단이 달랐다.

최영은 명나라의 요구를 굴욕으로 봤다. 맞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이성계는 명나라의 힘이 이미 압도적이라고 판단했다. 새로 들어선 명나라와 대립하는 것은 나라를 위험에 빠뜨리는 길이라고 봤다.

 

기반이 되는 세력이 달랐다.

최영은 기존 고려 왕실과 권력 구조를 지지했다. 그는 고려라는 틀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이성계는 달랐다. 그의 주변에는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라 불리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있었다. 정도전을 비롯한 이들은 고려의 기존 질서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성계는 이 세력의 힘을 이용했고, 그들의 지지를 받았다.

 

백성들의 마음도 중요한 변수였다.

당시 백성들은 권문세족의 횡포와 끊임없는 전란에 지쳐 있었다. 새로운 무언가를 원했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토지 개혁을 추진했다. 불법으로 빼앗긴 토지를 돌려주겠다는 신호였다. 백성들 사이에서 이성계에 대한 지지가 높아졌다.

최영은 군사적으로 강했지만, 시대의 흐름을 바꿀 정치적 기반이 없었다.

 

이성계는 군사력에 더해 새로운 정치 세력, 명나라와의 외교 노선, 토지 개혁이라는 민심까지 모두 손에 쥐었다.

고려의 마지막 선택은 처음부터 기울어진 싸움이었는지도 모른다.


최영과 이성계, 나란히 보면

두 사람에게는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둘 다 고려 말을 대표하는 핵심 장군이었다. 왜구 토벌에서 함께 공을 세웠고, 각자의 방식으로 시대의 혼란에 맞섰다. 개인적인 능력과 용기 면에서 둘 모두 역사에 남을 인물이었다.

차이점은 선택한 방향에 있었다.

 

최영은 고려 유지를 중심에 놓았다.

왕실에 충성했고, 기존 질서 안에서 나라를 바로잡으려 했다. 외세의 압력에는 강경하게 맞섰다. 그는 끝까지 고려의 신하였다.

 

이성계는 새로운 질서를 선택했다.

기존 체제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명나라와 관계를 안정시키고, 새 정치 세력과 손잡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길을 택했다.

 

최영은 처형되기 전 "나에게 죄가 있다면 하늘이 알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믿었다.

역사는 이성계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최영에 대한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다. 조선 시대에도 백성들은 최영을 기리는 사당을 세웠다. 충신의 이미지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고려의 끝, 조선의 시작

위화도 회군은 단순한 군사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려라는 500년 왕조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성계는 권력을 잡은 뒤 4년 만에 조선을 건국했다.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옮겼다.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았다. 토지 제도를 개혁했다. 새로운 나라의 틀을 빠르게 갖춰 나갔다.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는 조선의 설계자가 됐다. 그들이 꿈꿨던 유교적 이상 국가가 현실이 됐다.

최영이 지키려 했던 고려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가 평생 보여준 충절과 청렴은 조선에서도,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야기된다.

두 사람의 선택이 갈린 그 순간, 한국사의 큰 페이지가 넘어갔다.


본 글은 국사편찬위원회 및 한국민족문화대백과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