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4. 30. 10:10ㆍ역사 Detox_한국사를 알아보자

변화의 문턱에 선 조선
19세기 후반, 조선은 안팎으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안으로는 세도정치의 폐단이 깊었고, 밖으로는 서양 열강과 일본의 압력이 거세졌습니다.
조선은 선택을 강요받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의 중심에 두 인물이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과 고종(高宗, 1852~1919)입니다.
흥선대원군은 나라의 문을 굳게 닫으려 했습니다. 고종은 결국 그 문을 열었습니다.
두 사람의 선택이 엇갈린 지점에서 조선의 역사가 크게 바뀌었습니다.
흥선대원군 — 문을 닫아야 나라가 산다

권력을 잡은 배경
흥선대원군의 본명은 이하응입니다.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 아이가 고종입니다.
고종이 즉위할 당시 나이는 열두 살이었습니다.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섭정으로 실권을 쥐었습니다.
내부 개혁
흥선대원군은 먼저 내부를 바로잡으려 했습니다.
오랫동안 권력을 독점해온 안동 김씨 세도 가문을 밀어내고 인재를 고루 등용했습니다. 당파에 관계없이 능력 있는 사람을 쓰려는 시도였습니다.
전국에 600개가 넘던 서원을 47개로 대폭 정리했습니다. 서원이 면세 특권을 누리며 국가 재정을 갉아먹고, 지방 세력의 근거지가 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경복궁 중건도 이 시기의 주요 사업이었습니다.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는 목적이었지만, 공사 비용 마련을 위해 당백전을 남발하면서 물가가 오르고 백성의 불만이 쌓이는 부작용도 낳았습니다.
통상 수교 거부 정책
흥선대원군의 대외 정책은 분명했습니다.
서양과 일본의 통상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한 병인양요, 1871년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한 신미양요가 일어났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두 차례 모두 물리쳤습니다.
그는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습니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서양 문물과 세력을 받아들이면 나라가 오히려 위태로워진다는 판단이었습니다.
권력에서 물러나다
흥선대원군은 1873년 권력에서 물러났습니다.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성장하면서 흥선대원군의 섭정은 끝이 났습니다.
고종 — 열린 문 앞에서의 선택

친정의 시작
1873년, 고종은 직접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조선을 둘러싼 국제 환경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급격히 근대화를 이루며 조선에 개항을 압박했습니다.
고종 정권은 흥선대원군과 다른 시각으로 이 상황을 바라보았습니다.
강화도 조약과 개항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 인근에서 무력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조선에 조약 체결을 강요했습니다.
1876년, 조선과 일본은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조선이 외국과 맺은 첫 번째 근대적 조약이었습니다. 부산, 인천, 원산 세 항구가 개항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조선에 불리한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일본에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조선의 해안 측량권을 허용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외세 압력 속에서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은 미국, 영국, 독일 등 서양 여러 나라와도 잇달아 조약을 맺었습니다.
고종은 개화 정책을 추진하며 근대화를 시도했습니다. 1880년대에는 개화파 인사들을 중용하고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1882년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임오군란, 1884년 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이 잇달아 발생했습니다. 나라 안팎의 혼란이 깊어졌습니다.
고종은 청나라와 일본, 러시아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했지만 외세의 압력은 갈수록 거세졌습니다.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자리에 올랐습니다. 자주독립 국가임을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겼고, 1910년 결국 나라를 잃었습니다.
두 사람을 나란히 놓으면
공통점
흥선대원군과 고종은 모두 조선 후기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입니다.
두 사람 모두 나라를 지키려 했습니다. 방법이 달랐을 뿐, 조선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목표는 같았습니다.
차이점
흥선대원군은 폐쇄적 정책을 선택했습니다.
외세를 받아들이면 나라가 무너진다고 보았습니다. 내부를 강하게 다지고,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는 것이 조선을 지키는 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고종은 개항과 변화를 선택했습니다.
외세의 압력이 거세지는 현실 속에서 문을 닫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개항과 근대화를 통해 나라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두 선택 모두 결과적으로 조선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마주한 현실은 어느 쪽도 쉽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마치며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이야기는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떤 선택이 옳은가를 묻게 합니다.
문을 닫는 것과 문을 여는 것, 두 선택 모두 나름의 논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선택 모두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조선 후기의 역사는 선택의 어려움과 그 무게를 보여주는 시간이었습니다.
본 글은 국사편찬위원회 및 한국민족문화대백과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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